나의 신앙유산 답사기4 (호남편), 기묘사화와 기축옥사

끊임없이 차별당하는 호남의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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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0-01-13 [18:33]

 

훈구파와 사림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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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의 정신사조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훈구파와 사림파에 대해서 연구해 볼 필요성이 있다. 훈구파는 사림에 대비되는 학파로서 조선왕조를 개국하면서 역성혁명에 공을 끼친 사람들로서 조선왕조의 집권세력이 되었다. 그 이후 이들은 조선의 제7대 임금인 세조가 정변을 일으켜 임금이 되는 과정에서 적극 협력하여 권력을 잡게 된다.

 

훈구파는 세조의 왕위찬탈 과정에서 공을 세워 정치권을 장악한 정치집단을 이르는 용어로 정착되었다. 관학파라고도 한다. 조선초기 이들은 새 왕조의 문물제도를 정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여 큰 업적을 남겼고, 실용적인 학문에 능하였으며, 편찬사업에 종사하여 많은 서적을 편찬하기도 하였으나 성리학 본연의 철학적인 면은 소홀하였다.

 

반면 사림파들은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한 세조와 훈구파세력들에 대해서 적극 반대했다. 사림파는 고려에 대한 충성을 지켜 조선 건국에 참여하지 않고 지방으로 내려간 사람들의 후손들로서 나름대로 절도와 절개, 충절을 자부심으로 하고 있었던 사람들이다. 당시 사림파의 중심인물은 김종직과 조광조였다.

 

이들이 성종 때 정치집단으로 형성되면서 훈구파들과 불가피하게 대립하게 되고, 훈구파의 공격으로 여러차례 재앙을 당하게 된다. 사화는 사림이 당한 화라는 뜻이다.  

 

연산군 때의 무오사화와 갑자사화, 중종 때의 기묘사화, 명종 때의 을사사화 등 士林이 화를 당한 대규모 사화만 4차례나 있었다. 그러나 사림은 제14대 임금인 선조 때 부활하여 결국 정치집단으로서 권력을 잡고 성리학에 바탕을 둔 정치를 펼쳐 나갔다.

 

士林은 山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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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림파는 처음에는 중앙에 집중한 집권세력이라기 보다는 현실정치에 참여하지않고 자신의 지조를 지키며 학문을 닦았던 선비들을 말한다. 이들은 산간에 살았으므로 山林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사림파는 정신적으로는 역성혁명에 성공한 조선왕조의 현실정치에 참여하지 않고 끝까지 고려의 절개를 지키며 산속에 은거했던 고려선비들의 절개를 이어받아 의리와 절개, 명분을 중시하고, 학문적으로는 성리학을 사상의 기반으로 삼고, 유교경전을 토대로 하였다. 

 

정치적으로 중앙에 본격적으로 진출한 것은 제 9대 임금인 성종때였고, 성종은 세조때부터 주요 관직을 독차지 하여 집권세력이 되었던 훈구파들을 견제할 목적으로 사림파들을 사헌부, 사건원, 홍문관이라는 주요보직에 등용하였다. 사림은 초야에 머물고 학문만 하고 있었는데 성종 때 본격적으로 정치적 양상을 띠게 되어 훈구파와 대립하게 되었다.

 

사림의 정계진출

 

사림이 훈구파와의 경쟁에서 여러 차례 큰 피해를 당했는데도 결국 사림이 선조 때 권력을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지역적인 기반 덕분이었다. 사림은 지방에서 서원이나 향약을 중심으로 나름대로 세력을 키워나갔고,  훈구파에 부담을 느껴 그들을 견제하려는 왕이 견제차원에서 사림을 중앙 권력 한가운데 두었기 때문이다. 

 

호남에는 박상, 김정, 유옥, 김인후(1510-1560)와 기대승(1527-1572), 강항(1567-1618), 기정진(1798-1879), 전우(1842-1922)등이 사람의 학파를 형성하고 있었다.

 

사림은  성리학의 해석과 이를 현실 사회에 적용하는 방안에 따라 다양한 학맥을 구성했다. 그래서 권력을 차지한 이후 사림은 학맥이나 정치적인 입장에 따라 동인과 서인, 다시 남인과 북인, 노론과 소론 등 여러 붕당으로 갈라져 순수한 정신적 절개와 충절의 의식은 사라지고 파당만 구성하게 되었다. 

 

한국의 장로교파도 사림이상 분당과 파당으로 구성되었다. 합동, 통합, 개혁교단이외 수많은 합동교단의 아류가 있게 되었다. 이는 사림파의 분당정신이 그대로 전수되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사림은 경상도와 호남사람들 모두를 포함하고 있었다. 

 

기묘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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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의 사림들이 조선조에 의리정신을 처음 심었던 것은 중조반정이후 전국공신들에 의하여 죄없이 궁중에서 쫏겨난 愼妃(신비)를  복위시키라는 상소를 올렸을 때이다. 이는 호남의 박상, 김정, 유옥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박상은 무안현감 유옥과 순창군수 김정등과 함께 죽음을 각오하고 청복고씨신씨소를 올렸다. 신비복위의 상소였다. 1506년 중종반정 당시 박원종이 중종의 장인 신수근을 살해하고 중종비 신씨를 폐위하자, 눌재 박상이 순창군수 김정과 함께 중종비 신씨를 복위할 것을 상소하였던 것이다. 결국 눌재 박상은 곤장을 맞고 유배되었다.

 

신비복위 상소는 사림파와 훈구파의 대립과 갈등을 불러일으켰고, 사림들은 전국공신의 삭훈을 주장하게 되어 공신의 4/3을 삭감하면서 훈구대신들의 반발을 사게 되었다. 호남삼인의 신비복위상소로 인해 사림들은 기묘사회(禍)를 당하게 되었다. 상소를 올린 이들은 모든 관직을 박탈당했고 남평으로 정죄당하는 화를 겼었다. 

  

박상은 누구도 연상군의 부정에 대항하지 못할 때 일개 지방관리로서 연산군의 불의에 맞서는 용기를 보여주었다. 박상의 이러한 불의에 맞서는 항거와 의리에 대한 실첱 정신은 호남사림학파들의 정신을 대표하는 것이었다. 

 

기묘사화는  중종반정으로 공신 117명이 선정된 가운데 76명은 뚜렷한 공로도 없이 공훈을 남수()하였으니 호남사림들이 중심이 되어 이들을 공신에서 삭제하여 작위를 삭탈하고 그들의 전답과 노비 등도 모두 국가에 귀속해야 한다는 위훈삭제사건을 야기시킨 사건이었다. 

 

당시 조광조가 호남사람은 아니지만  적극적으로 주장했고 신진세력들은 조광조의 이러한 개혁정책에 환영하였지만 훈구파는 반발이 거세었다. 특히 중종은 임금의 권위마저 압박해오는 것으로 받아들여 조광조와 신진 사류들을 경계하고 사림들을 토사구팽하였다.

 

결국 조광조는 능주()로 귀양가서 한달만에 죽고, 김정, 기준,·한충 ,·김식 등은 귀양갔다가 사형되었다. 김구 등 수십명도 역시 유배되고, 이들을 두둔한 김안구, 김정국 등은 파직되었다.

 

사림파의 몰락으로 현량과는 폐지되었고 공신에서 삭탈된 훈구파들은 모두 복훈되어 빼앗겼던 재산을 모두 되찾았다. 기묘사화는 호남 사림들의 입바른 소리를 하다가 당한 화이다. 호남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정신사적인 면에서 대의와 충의를 지킨 지역인이었다.

 

호남 사림의 의리정신과 현실개혁의지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의 국란때에는 의병활동으로 나타났고, 조산말기에는 사회적 모순과 사회제도개혁을 위한 실학파의 현실개혁운동으로 이어졌고, 옹민들의 힘이 결집된 동학운동에 강력한 영향력을 끼쳤다. 그러나 사림파들이 성종 때 중앙정계에 들어 정치화되면서 사색당파로 갈려 선조 때 임진란에 속수무책이었지만 순수한 학문과 절개, 충절, 의리의 정신세계는 훗날 호남인들이 개혁을 실천에 옮기도록 한 동력으로 서 작용했다. 사림의 학문세계는 성리학이었다.  

 

훈구파도 초기에 주자가 기초한 성리학을 조선왕조를 개혁창도하는데 기초하였듯이 사림파를 지배한 학문도 성리학이었다. 성리학은 실학이 나올 때까지 조선의 정신세계를 지배한 학문이었다. 훈구파와 사림파를 지배한 성리학을 고찰해 보자.

 

성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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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리학은 송나라 주희가 공자, 맹자 등의 유교사상을 풀이하여 유교사상을 토대로 철학으로 우주의 이치와 본성을 이기론을 통해 종합적으로 파악하려는 학문이다. 즉 인간의 本性과 우주의 운행 原理에 관한 철학적인 연구라고 볼 수 있다. 정도전, 권근으로 대표되는 조선 초기학자들은 불교의 폐단을 극복하기 위하여 성리학을 수용하여 유교적인 제도정비를 중심으로 현실정치에 적용하였다.

 

이러한 성리학이 조선시대 결정적으로 뿌리를 내리는데 기여한 사람은 이황과 이이였다. 이황은 성리학의 이를 강조하여 주자서절요, 성학십도를 저술하였고 율곡 이이는 기의 역할을 강조하여 현실적으로 개혁적인 성격을 가졌다.     

 

성리학의 학문적인 전통은 성종 때 중앙진출을 한 사림파가 계승하였다. 이들은 형벌보다는 교화에 의한 통치를 강조하였고 공신과 외척의 비리를 성리학의 명분론에 입각하여 비판을 하였다. 그러나 성리학은 선조 때에 중앙정계의 주도세력으로 등장함에 따라 각 학파를 기반으로 정파가 형성되었다.

 

서경덕, 이황, 조식학파는 동인을 형성하였고, 이이학파는 서인을 형성하였고, 동인은 정여립 모반사건을 계기로 이황학파의 남인과 서경덕학파와 조식의 학파의 북인으로 분화되었다. 북인은 인조반정이후 몰락하면서 남인에 흡수되었다. 정여립사건은 호남을 차별의 땅으로 가져가게 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호남의 차별이 본격적으로 시작한 계기는 정여립사건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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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축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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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을 차별로 만들었던 대형사건이 기축옥사이다. 기축사화()라고도 한다. 이 사건은 동인 정여립이 1598년(선조 2년)에 반란을 꾀하고 있다는 소문으로 인해 충분한 증거도 없이 서인들에 의하여 동인들이 무고하게 당파정쟁으로 인해 희생된 사건이다. 사건은 이이의 일파였던 서인세력에 소속한  정여립이 이이가 죽고난 후 그를 비판하고 배신하였다는 데서 비롯된다.

 

서인들은 정여립을 탄핵하고, 정여립은 동인에 합류하여 동인의 중심인물로 떠올랐으나 전주로 낙향하여 진안 죽도에서 대동계를 조직한다. 정여립은 대동계를 조직하여 왜구를 토벌하기도 하였으나 1589년 황해 감사 한준, 안악군수 이축, 재령군수 박충간 등이 정여립이 반란을 꾀하고 있다는 죄목으로 고발하여 체포령이 내려진 상태에서 정여립은 자결하게 된다.  

 

서인 세력은 정여립의 내란음모 소문으로 동인 세력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하는 기회로 삼기 위해 정여립의 모반 사건을 계획하였다. 서인인 관동별곡의 저자 정철 주도 아래 수많은 동인의 인물들이 탄압을 받았다. 정여립의 사건과 관련된 국문()은 3년 가까이 계속되었고 이 기간 동안 동인 1,000여 명이 화를 입었으며,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동인은 몰락하고 서인이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다. 그리고 호남 출신의 관직 등용에 제한이 가해지기도 했다. 이후 호남출신자들은 과거제도에 합격률이 급격히 저하되었고  관직차별을 당하게 되었다.

 

정여립이 모반을 했다는 증거는 없어도 정여립이 모반이라는 명분을 준 것은 “천하는 공물()로 일정한 주인이 있을 수 없다”는 ‘천하공물설()’과 “누구를 섬기든 임금이 아니겠는가”라는 하사비군론()을 주장하며 혈통에 근거한 왕위 계승의 절대성을 비판하고 왕의 자격을 중시한 것이다.

 

당시로서는 수용하기 어려운 주장이었고 모반이라는 명분을 주기에 충분한 주장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상적 경향은 정치의 도리와 의를 강조한 조식의 문인이나 성리학의 주체적 해석을 강조한 서경덕의 문인들에게서 많이 나타나고 있던 것으로 모반의 근거로 볼 수는 없다는 주장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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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하튼 기축옥사는 조선시대에 당쟁을 확대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 동인과 서인의 갈등은 점차 심화돼 1592년 임진왜란의 발생도 막지 못하는 참혹한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였다. 정여립은 이이라는 전설적인 학자를 비판했다는 것과 왕권에 대한 혁신적인 사상적 주장을 했다고 하여 모반자로 몰렸던 것이다. 정여립은 43세의 젊은 나이로 불운한 인생을 마쳤고, 그를 매개로 발발한 기축옥사는 조선의 역사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정여립으로 인해 호남은 배신과 역모지역으로 몰리면서 차별을 받았고 현대에서는 독재정권이 김대중을 내란 음모죄로 선언함으로써 정여립 이후 호남은 특정인의 지역이라는 이유로 다시 정치적, 경제적으로 차별받는 지역으로 전락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호남의 학문과 정신은 기묘사화의 절개정신과 기축옥사의 누명의 한을 통하여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고 오늘날까지 호남인은 불굴 저항의 정신과 누명의 한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불굴의 저항정신과 한이 동학혁명, 광주학생의거, 광주민주항쟁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이처럼 역사적으로 기묘사화와 기축옥사의 누명의 한이 있고, 농민들의 수탈과 착취로 인한 농민의 한이 있는 호남지역에 꼽슬머리와 뾰족코와 푸른눈, 어눌한 한국어를 구사하는 외국인들이 차별과 한을  육체적, 정신적, 영적으로 치유하기 위하여 예수의 사랑의 씨앗을 갖고 들어왔다. 그들은 동학교도를 치료하고, 학교를 세우고, 병원과 교회를 세워서 영적 정신적 불모지인 호남을 조금씩 치유해 나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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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신앙유산 답사기1(호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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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신앙유산 답사기4 (호남편), 기묘사화와 기축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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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신앙유산 답사기5(호남편), 사림과 붕당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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