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신앙유산답사기 11 ( 호남편), 선교사들이 본 동학

한의 종교, 동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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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0-02-04 [23:31]

 

 

  

동학운동은 처음에는 1894년(고종 31) 2월 10일 엄동설한에 고부군수 조병갑()의 지나친 가렴주구에 항거하는 광범위한 농민층의 분노가 폭발한 작은 민란에서 시작하였다. 

 

 조병갑

 

국가가 초기에 이를 잘 해결하면 수많은 농민들의 죽음을 방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조정은 동학농민들의 청을 들어주기 보다는 진압에만 촛점을 두다 보니 광주사태처럼 정부가 국민들을 살상하는 비참한 사태가 발생했다.

 

 

 

 

 

당시 조정은 청일까지 끌어들여 동일한 민족을 살상하는 어처구니 없는 사태가 발생했다. 신라의 나당연합군의 고구려와 백제 진압, 고려의 여몽연합군의 삼별초진압, 조선의 청일연합군으로 동학진압, 소련을 통한 남한의 살상은 우리나라의 슬픈 역사이다.

 

호남은 피와 한의 땅

 

또한 전두환은 자신의 권력찬탈을 위하여서 북한과 싸워야 할 군대까지 끌어들여 광주시민을 무참하게 학살하였던 것이다. 공통적으로 희생의 대상이 된 것은 호남인들이었다. 그러므로 호남은 피의 땅이고 한의 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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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별초, 임진란, 후백제, 동학과 광주항쟁은 사라졌지만 호남은 여전히 피의 땅, 한의 땅으로 남아있다. 아마 호남의 한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는지도 모른다. 전주, 정읍, 영광, 완도, 목포, 광주는 호남인들의 붉은 피가 서려있는 곳이다.  나주, 강진, 화순, 보길도 등은 유배의 한이 사려있고, 영광은 순교의 한이 서려있는 지역이다. 순천과 여수는 반란의 한이 서려있다. 이처럼 호남은 피와 한의 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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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 종교 동학은 종교로서 출발하였지만 사회적, 경제적인 이유로 인해 동학의 실천으로서 탐관오리의 숙청, 동학농민군의 참정권 요구, 양반토호들의 탐학 배격, 토지재분배의 요구, 노비해방 등 반봉건적 개혁요구와 일본세력의 배격 등 1884년 갑신정변 때의 개혁 정강보다도 더 큰 혁신적인 주장을 했다. 하나의 종교가 민족운동으로서 승격을 한 것이다.  

 

결국 동학농민항쟁은 1년만에 전쟁에서 패배하여 해산되었지만 우리 시대에 동학이 주는 영향은 너무나도 크다. 농민들의 한이 표출된 운동이었다.  동학은 한국 민족주의 운동으로서 반외세, 반봉건운동이다. 척왜양이를 강하게 부르짖는 것을 볼 때 대외저항정신이 강하고, 대내적으로는 신분적 평등을 요구하는 근대적 개혁을 제시한 '페정개혁 12개조'에서는 근대적 성격도 나타난다. 그러나 동학은 너무나도 많은 인명 살상피해를 냈디.

 

이처럼 동학은 서세동점으로 위기의식이 고조되었을 때 나름대로 근대화로 나아가려는 일종의 위기적 상황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려는 종교를 기반으로 한 호국운동이었다. 그래서 한국사람들에게 동학은 친숙하고 성과는 거두지 못하고 실패로 끝났지만 민족의 가슴을 여미게 하는 민족의 정신이 살아있는 민중운동이었다. 이러한 동학운동은 3.1운동, 광주 민주항쟁으로 이어진다.

 

지금도 광화문에서 많은 시민들이 모여서 항의를 하는 것도 나름대로, 이념의 한, 교육의 한, 경제의 한, 정치의 한이 있기 때문이다. 1987. 6. 10 항쟁운동도 시민들이 군부정부에 대한 정치의 한이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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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동학항쟁에 대해서 당시 개신교 선교사들은 이러한 사태를 어떻게 관찰했는지 지켜보는 것도 의미심장한 일일 것이다. 호남에는 남장로교출신 전킨 (Willam M. Junkin, 1865-1908)선교사가 동학란이 발생하기 1년 전 1893년에 호남지방을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했고, 1894년 동학농민전쟁으로 서울로 일시 철수하였고, 1896년부터 군산과 전주를 중심으로 활발한 선교활동을 하였다.

 

선교사들이 본 동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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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킨선교사는 외국 선교사들이 조선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발행한 <The Korean Repository>라는 잡지에 1895년 2월에 동학 <The Tong Hak)에 대한 글을 올린다. 그의 생생한 증언이 담겨있다.

 

전킨은 최제우에 대한 언급을 하면서 최제우는 서양 천주교에 대한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고, 천주교가 진정한 종교라면 조선조정으로부터 왜 많은 사람들이 순교를 당했는가를 의아해 하고있다는 것을 전한다. 실제 최제우는 서학의 천주개념을 수용하면서 서학에 대응할만한 종교를 동학이라고 창도하게 된다.

 

전킨선교사는 최제우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가졌다. 최제우는 어느날 혼수상태에서 신을 만났는데 신이 나를 경배하면 "너는 사람들에 대한 권세를 갖게될 것이다"고 하면서 최제우가 신에게 "천주교가 진정한 종교입니까" 라고하자, "아니다, 가르치는 말씀과 하늘이 정한 것은 전진이나 그 사상과 정신은 진실하지 않다"고 대답하여 최제우가 유일신체험을 한 것을 기술했다. 동학에 상제개념이 들어오게 된 이유이다. 

 

최제우는 천주교로부터 신의 개념을 끌어들였다. 그것이 기독교의 신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고 할지라도 서학으로부터  유일신 개념을 끌어들이고 여기에 유.불. 선을 가미시켜 혼합된 상태에서 동학을 창도한 것이다.

  

전킨선교사도 최제우는 신을 만난 경험을 중시하여 창도의 계시로 인식하고 5가지 유교관련 서적과 불교, 도교등의 원리를 기초로 <동경대전>을 집필하였다고 보고 있다. 전킨은 동학의 기도문 채택도 서학에서 왔다고 판단하고 있다.  

 

이외에도 전킨선교사는 충청도에서 살해된 동학교도에서 부적이 나왔는데 내용을 보면 부적을 넣고 다니면 수많은 악마를 물리칠 수 있고, 무기에도 견딜 수있고, 자유자재로 공간을 이동할 수 있다고 되어 있다는 것이다. 전킨선교사는 부적에 대해서 중국의 영향을 받은 듯 하고, 동학은 종교로서 출발하여 정치화되었는데 정치성을 표방하지 않았더라면 종교단체로서 살아남일 수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전킨선교사가 동학의 이론적인 면을 소개한 반면, 캐나다에서 파송된 매켄지(Willam John Mcenzie, 1861-1895)는 동학농민의 체험담을 '동학교도들과 함께한 7개월'<Seven months among the Tong Haks)이란 제목으로 1896년 6월호 <The Korean Repository>지에 실었다. 1894년 10월부터 황해도 북서쪽 마을에서 체험한 동학교도의 이야기를 적고 있다.

 

매켄지(Willam John Mcenzie, 1861-1895)

 

매켄지도 동학의 기독교적 요소를 중시했다. "동학의 한 지도자는 기독교도와 동학교도는 하나님을 경배하며 , 그러므로 동학과 기독교는 동일하다"고  말했다는 것을 적고있다. 메켄지는 "동학교도는 몸을 정결하게 하며 매일 하나님께 기도하며 종종 헌금도 바친다, 몇몇 지도자들은 성경을 소지하고 있다"고 언급하면서 "서양사람들은 동학교도들에 대해서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말하고 있다.

 

이어 서경조의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한 동학지도자가 동학교리를 가르칠 때 신약성서의 가르침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매켄지 선교사는 동학교도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장치 기독교도가 될 것을 인식하기도 하였다. 실제 백범 김구선생도 처음에는 동학교도였다가 기독교로 전향한 바 있다.  

 

매켄지와 많은 친분을 나누었던 언더우드 여사 역시 동학을 중국의 의화단과 같은 반서구적이면서 조선을 위한 조선의 신조로 판단했다. 언더우드 여사에 의하면 "동학의 명분이란 오리엔트의 신조를 의미했으며 동학교도들은 서구인들, 서구적 사상, 서구적 개혁과 번화를 물리치고 옛날의 법과 관습으로 돌아가서 그것을 재확립하고자 하는 요구와 뜻을 선언하였다" 고 했다.

 

반면 비숍여사는 동학에 대해서 "모두 중요하고 대규모로 조직된 운동이었고, 명분 또한 분명하게 합리적이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동학의 지도자를 반란자라고 부르기 보다는 무장개혁자로 부르고 싶었다"고  하여 서구인들이 보는 관점이 공통적인 면도 있지만 다양했다.<상투의 나라, 집문당, 1999>  

 

이와같이 당시의 서구 선교사들은 동학은 천주교로부터 와서 기독교의 영향이 상당히 지배적인 것으로 판단하였고, 나름대로 동학은 서학을 끌어들인 오리엔탈리즘으로서 사회현실의 부조리를 보고 현실개혁으로 뜻을 이루려는 실천종교로서 보았던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동학은 실천과 개혁을 추구하는 기독교와 많은 공통점이 있기 때문에 훗날 많은 동학인들이 교회로 들어왔고, 이들이 항일개혁운동을 하는데 선두주자로서 역할을 한다. 

 

실제로 민족 33인 대표중에 동학(천도교)교도가 15명으로 절반이상을 차지하는 것만 보아도 동학이 항일운동에 앞장을 섰고, 또한 기독교와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동학에 기독교와 동일한 요소가 많이 있었다는 것을 암시해준다. 

 

동학의 정신은 일제시대에는 항일혁명으로, 쿠바에서는 사회주의 혁명으로, 군사정부에 대해서는 반독재로 투쟁을 하게 되어 동학의 정신은 지금도 호남정신의 일부가 되었다. 

 

나의 신앙유산 답사기1(호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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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신앙유산 답사기2(호남편), 차별의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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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신앙유산 답사기3 (호남편), 조선의 개혁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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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신앙유산 답사기4 (호남편), 기묘사화와 기축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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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신앙유산답사기 6(호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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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신앙유산답사기 8( 호남편), 실학과 서학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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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신앙유산답사기 9(호남편), 실학과 임진왜란을 통한 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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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신앙유산답사기 10(호남편), 해외로 간 동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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