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신앙유산답사기, (고흥편)

서구를 만났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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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0-10-24 [0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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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빛낸 고흥의 스포츠인들

 

고흥은 보성밑에 있는 도시로서 남해와 맞닿은 가장 남단에 위치한 지역이다. 소록도와 나로 우주센터가있는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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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곳은 서구의 근대정신을 받아들여 일찍부터 근대 체육의 눈을 떠 세계적인 선수를 양산한 것이기도 하다. 김일과 유제두, 박지성이 그들이다. 김일이 서구의 레슬링이라는 스포츠를 수용하지 않았더라면 씨름선수로서만 남았을 것이다. 

 

유제두도 복싱이라는 서구의 스포츠를 받아들이지 않았더라면 조양은 처럼 싸움군으로서 남았을는지도 모른다. 박지성도 서구의 감독을 알지 못하였다면 아시아의 선수로서만 전락했을 것이다. 

 

그들은 서구의 운동경기에 일찌감치 눈을 떴고 서구의 지도자를 잘 만나 절망과 불운의 시대를 사는 한국인들에게 한을 풀어주고 "우리도 할 수 있다"라는 새로운 희망을 심어 주었다. 

 

대한민국이 한단계 도약하기 위해서는 서구의 정신과 서구에 대해서 눈을 뜨는 것이 필요했다. 서구가 온 세상의 문명을 지배했기 때문이다. 

 

김 일

 

김일은 자신의 힘을 세계화시키는 법을 알고 있었다. 자유당시대 최대의 씨름선수는 이정재 였다. 자신의 힘으로 실현시킬 곳이라고는 정치밖에 없었다고 판단했다. 결국 세계의 스포츠를 몰랐던 이정재는 정치에 몸을 맡기게 되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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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60-70년대의 암울한 시기에 김일은 서구의 레슬링이라는  스포츠에 힘입어 박치기 하나로 온 한국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70년대 당시 김일은 한국의 아이돌이었다.


1963년 WWA 세계 태그 챔피언, 1967년 WWA 세계 헤비급 챔피언 등 다수의 타이틀을 땄던 김일은 국내 프로레슬링 1세대인 고 장영철, 천규덕 등과 함께 국내 무대에서도 활동하는 한국인들의 희망이었다. 당시는 방탄소년 이상 인기가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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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에 찌달려 희망이 없던 시대에 한반도 가장 남단에 위치한 고흥이라는 곳에서 세계적인 프로레슬러가 등단하여 박치기 하나로 전세계의 프로레슬링계를 장악했던 것이다. 일제시대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과 같은 효과가 있었다. 고흥에 가면 김일체육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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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육관안에 들어가면 김일은 소년때부터 힘이 장사로 16세의 나이에 이미 6척장신의 성인들을 제치고 씨름판의 영웅이 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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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에 김일은 일본으로 말항하여 역도산의 제자가 되면서 일본 및 전세계 세계 참피온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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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일본에서 고혈압으로 쓰러진 이후 1994년 1월 귀국해 투병 생활을 이어 가다가 2006년 10월 세상을 떠났다. 생전 국민훈장 석류장(1994), 체육훈장 맹호장(2000)을 받았으며, 사후 체육훈장 청룡장(2006)이 추서됐다.

 

2018년에는 대한체육회가 선정하는 대한민국 스포츠 영웅으로 뽑혔다. 그는 현충원에 묻혔다. 그야말로 국민 레슬러였다.

 

유제두

 

김일 이외에 주먹으로 전세계를 사로잡은 국민복서가 있다. 그는 유제두였다. 유제두도 고흥출신으로 1975년 WBA Jr.미들급 세계챔피언이 되었다. 총전적은 55전 50승(29KO) 3패 2무 로서 전설적인 복싱선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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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성

 

이외에 고흥출신으로 전설적인 축구선수가 있다. 박지성은 1981년 2월25일 전남 고흥군 점암면 신안리 775번지에서 박성종(45)씨와 장명자(47)씨 사이에 외아들로 출생했다. 전남 고흥군 신안초등학교 2학년 재학때인 1990년 1월 아버지의 사업관계로 온 가족이 경기도 수원으로 이사했다.

 

박지성은 알렉스 퍼거슨 감독 시절 '수비형 윙어'로 뛰며 맨체스터 유니이티드에서 연봉 3위에 오를 정도로 세계적인 축구선수였다. 차범근 이후 박지성이 없는 한국축구는 의미가 없을 정도로 그는 월드컵 4강의 주역이기도 했다.

 

그의 인생은 서구의 히딩크라는 지도자를 를 만남으로서 새롭게 도약되었다. 그는 영국 프리미어 최대의 전설적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주전공격수가 되었다.  

 

 
2002 한·일 월드컵 포르투갈전에서 골 넣고 환호하는 박지성

 

박지성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이하 맨유)에서 프리미어리그 우승 4회, 챔피언스리그 우승 1회 등 수많은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네덜란드 리그 우승(2회)과 리그컵 등을 포함하면 유럽 무대에서 17차례나 우승의 기쁨을 맛보기도 했다.

 

고흥의 전설이 되었다. 그는 차범근이나 손흥민보다 유럽최고의 명문팀에서 주전공격수로 활약하면서 유럽리그에서 많은 우승을 맛본 사람이기도 하다. 

 

박지성의 연봉은 83억 4천만원으로서 맨유 선수단 중 공격수 웨인 루니(153억원), 수비수 리오 퍼디낸드(108억6000만원)에 이어 팀내 3위에 해당한다.

 

그는 고흥출신으로서 2000년대 한국스포츠의 영웅이었고 유럽에서 한국인의 위상을 한층 끌어올린 사람이기도 하다.  그래서 고흥에 가면 박지성 공설운동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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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 유제두, 박지성은 고흥출신으로서 모두 스포츠계의 전설이 되었다. 박지성은 산소통을 두개나 메고 다닌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지치지 않는 선수였다. 

 

이러한 고흥에 19세기말부터 일찍 복음이 들어왔다. 복음이 들어오면 지역이 발전하고 국가가 발전하고 우수한 인재들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 특징이다. 

 

인근 도시 보성에도 복음이 들어왔다. 보성이 고향인 서재필은 철종의 사위였던 박영효, 서광범, 김옥균과 함께 1884년 3일 천하 갑신정변을 일으켰지만 일본의 배신으로 실패하고 만다.

 

이들은 서구사회에 관한 문명서적을 통하여 실학 사상의 긍정적 요소와 세계정세의 흐름 및 자본주의에 관한 새로운 지식을 습득함으로 조선사회의 개혁을 눈을 뜨고 일본을 배경으로 하여 개혁을 하고자 쿠데타를 일으키려 하였지만 실패하고 만다.

 

이 당시 서재필의 나이는 19세였다. 그는 일본으로 도망하여 다시 미국으로 가서 미국과 서구의 개신교도들을 만나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의학박사가 된다. 22살에 의대에 들어갔고 기독교에 귀의하게 된다.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김옥균

 

일찍부터 서구의 근대화와 개혁에 눈을 뜨면서 1884년 12월 갑신정변을 일으켰지만 실패로 끝나고 일본으로 도피하여 미국으로 가면서 그의 인생은 다시 바뀌었다. 우리나라에 다시 와서 영한 혼용문의 독립신문을 만들기도 했다. 한국은 서구의 도움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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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아직 우리의 힘만을 의지하고 월드컵 주역이 될 수 없었다. 2002년 한국은 서구의 지도자를 만남으로 인해 월드컵 4강의 주역이 되었다. 한국은 당분간 서구의 힘이 필요했다.

 

한국인들은 방향성만 잘해주면 누구든지 세계화가 될 수 있는 잠재성이 있었다. 신안 하의도의 촌구석에서 태어나 폭포에서 상고를 졸업한 사람이 서구를 통하여 민주주의를 알다보니 노벨상까지 받게 되었다.

 

김대중대통령은 납치시 하나님을 만나, 용서와 화해의 지도자가 되어 살리는 정책을 실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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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까지만 해도 썰매에 익숙한 한인들이 서구의 스케이트를 알게되다보니 동계 올림픽의 강국이 되었다. 김연아는 피겨스케이트계를 장악하여 올림픽 2연속의 금메달을 받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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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한국은 월드컵에도  연속적으로 9회 이상 참여할 정도로 축구강국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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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흥민은 프리미어리그에서 최고의 선수가 되었고 현재 득점 랭킹 1위이며 한국의 월드컵 10회출전을 눈앞에 두고 있다. 손흥민의 70미터 질주의 골은 2019년 영국 프리미어 최고의 골이 되었다.

 

 70미터를 질주하는 손흥민

 

일찌기 서구에 진출했던 손흥민은 프리미어의 최고의 선수가 되었다. 축구의 규칙을 알았고 세계적인 선수가 되는 법을 알기위해 일찍부터 그의 아버지가 그를 독일로 진출시켰던 것이다. 

 

지금은 차범근과 박지성을 능가하는 선수가 되었다. 프리미어 최고의 골게터가 되었던 것이다. 손흥민은 선교사들이 가져단 준 기독교 신앙을 잊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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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를 통하여 근대문명을 받아들인 한국은 문화나 스프츠 면에서 세계적인 강국으로 되어가고 있다. 방탄소년단은 빌보드 차트 1위까지 석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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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를 받아들인 한국은 문화나 스포츠, 반도체나 전자면에서 일본을 압도적으로 앞서고 있다.

 

선교사들 역시 구한말과 일제하에서 암울했던 한국인들에게 학교와 병원, 교회를 세워 신문명과 신교육을 일깨워주었다. 선교사들이 세운 제중원은 세계적인 세브란스병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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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를 만났을 때

 

한국은 선교사들을 통하여 일찍부터 근대문명과 근대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불교나 유교를 통한 1000년이라는 세월의 남는 것은 부패와 국가의 패망뿐이었다. 나라를  잃어버렸다.

 

오랜 역사를 거쳐서 불교와 유교를 채택한 결과는 사색당파와 임진왜란, 병자호란, 한일합방, 노예같은 식민지였다.  

 

그러나 구한말 들어서 유교와 불교, 이슬람권이 지배하는 다른 아시아 국가 달리 한국은 일찍부터 선교사들이 전해준 신앙을 수용하면서 그야말로 세계적인 국가가 되었다. 경제, 스포츠, 예술, 문화강국이 되었다.

 

고흥 출신의 박지성이 서구의 히딩크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명지대출신 축구선수로서 2급이나 3급 프로팀에서 1억도 안되는 연봉을 받고 삼류선수로서 마감했을는지 모른다. 기껏해야 일본에서나 선수생활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만큼 우리나라는 모든 면에서 근대화를 통한 서구문명이 절실하게 필요했던 것이다. 서구의 교육과 스포츠문명을 받아들인 한인들은 스포츠인으로서 세계적인 선수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교육은 한국이 경제대국이 되는데 큰 힘을 보탰다.

 

오늘의 코로나 전염병시절에 세계적인 의술을 갖게 된 것도 100년전부터 선교사들이 전해준 의학교육 덕택이었다. 선교사들은 단지 병만 고쳐준 것이 아니라 병을 고쳐줄 의사를 양산했다. 그러나 중국이 우리나라의 근대화를 위해 해준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최근에는 코로나 전염병면 갖다가 주었다. 

 

우리나라가 일찌기 서구로부터 교육과 근대화를 통한 서구의 정신과 규칙을 배우지 못했더라면 한국은 베트남처럼 삼류국가로 전락했을 것이다.  

 

베트남은 우리나라의 70년대처럼 동남아시아축구대회에서 우승만 해도 천국이었다. 국가가 흥분했던 것이다. 한국도 70년대 메르데카컵 우승했을 때 그처럼 흥분하고 뛰었다. 선수들이 공항에 도착하면 카퍼레이드를 벌이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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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리는 종교

 

한국에는 100년 이상된 교회가 924개나 된다. 모두 선교사들의 덕분이다. 선교사들은 예수정신을 주었고 중국은 상해 고려공산당처럼 모택동의 사상을 전해주었다.

 

예수의 정신을 가진 선교사들이 세운 병원은 동학난, 여순사건, 광주항쟁사건에서 부상당한 사람들을 치료해주기도 하였다. 

 

전주에서는 동학난이후 예수병원에서 병에 걸린 사람들을 수천명이나 치료해 주었다. 아이들부터 어른까지 병원앞에서 줄을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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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병원의 설립자 잉골드 여사는 한복을 입고 진료하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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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살리는 종교이기 때문에 부산과 여수, 고흥 소록도 병원에서 나환자들을 치료해주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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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는 광주항쟁시 광주 기독병원에서는 광주항쟁으로인해 피흘리는 많은 광주시민들을 치료해 주기도 했다. 기독교의 정신은 예수의 정신을 구현시켜 사람을 살리는데 앞장을 섰다.  

 

 광주 기독병원

 

1970년대 김일, 유제두는 6.25 이후 가난과 절망에 빠진 한국인들에게 이마와 주먹으로 기를 살려주었고, 2000년대 박지성은 발로 수많은 한국인들에게 정신적 기를 살려주었다. 

 

선교사들이 세운 예수병원과 기독병원은 육체적인 생명을 살려주었다. 이번에는 영적인 생명을 살려준 사람들이 있었다.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할 때는 동학난이 발생할 때였다.

 

고흥의 사회적 상황

 

19세기 후반은 조선의 관리들의 부패와 소작인들에 대한 착취로 인해  삼정이 문란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것이 훗날 동학난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조선후반은 그야말로 부패의 일변도였다. 농민들은 더이상 살 희망조차가 없었고 이래 죽으나 저래죽으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농민들의 난이 계속 발생했다. 

 

삼정은 토지세인 전정(), 군역을 포()로 받는 군정(), 정부의 구휼미 제도로 사실상 고리대금업이 돼버린 환정() 또는 환곡()이다. 가장 부패한 것이 환정이었다.

첫째로, 전정의 문란은 말그대로 밭의 문란이었다. 법으로 정한 조세 외에도 갖가지 명목의 부가세와 수수료를 농민들에게 물리는가 하면, 농사를 못 짓는 황무지에도 세금을 부과하고, 심지어는 백지징세()라 하여 빈 땅에 세금을 물리는 것 등으로 나타났다.

 

농민들에게 대지는 더이상 희망의 상징이 아니었다. 땅은 정직했지만 사람은 부정직했다. 땅보다도 못했다.

 

그래서 대한민국은 땅보다 하늘의 진리를 가르칠 사람들이 필요했다. 서서히 땅에 실망을 느낀 사람들이 하늘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하늘을 바로볼 때 대한민국의 역사는 서서히 변해가고 있었다. 고흥에도 기쁜 소식을 전하는 복음이 들어오니 고흥에서 한국사람들을 기쁘게 해주는 전설적인 스포츠인들이 탄생했다. 한 때 이들은 한국인들의 기쁨이었다.       

두번째, 군정의 문란은 지금도 그렇지만 군세금의 문제때문이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군대의 문제점은 사그러들지 않는다. 최근에는 추미애의 아들 군휴가 때문에 논란이 되기도 했다. 이회창도 아들의 군대면제때문에 대통령에 낙마했다. 당시에도 군대의 문제는 여전했다.

 

정부는 별의 별 짓을 다하여 백성들로부터 세금을 뜯어갔다. 군적에 올려 군포를 부과하는 황구첨정(), 이미 죽은 사람도 살아있는 것으로 꾸미거나 체납액을 이유로 군적에서 삭제해주지 않고 가족들로부터 계속 군포를 거둬가는 백골징포(), 도망간 사람의 군포를 친척이나 이웃에 부과하는 족징()·인징() 등의 형태로 나타났다.


세번째, 환정은 가장 부패했다. 환정이 원래는 춘궁기에 농민에게 식량과 씨앗을 빌려주었다가 추수한 뒤에 돌려받아 농업의 재생산을 도모하고 군자미를 매년 새로운 곡식으로 전환시키는 선한 정책이었다.

 

그러나 빌려준 곡식을 돌려받지 못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자연적으로 소모되는 곡식이 증가되자 모곡이라 하여 1/10을 이자로 더 돌려받게 되었다.

 

국가 재정이 어려워지고, 아전들의 횡포가 늘어나면서 모곡의 양이 1/10에서 1/2로 늘어나는가 하면 빌려주는 원곡에 모래나 겨를 섞어 실제 양을 줄이고 후에 거두는 모곡은 원곡대로 받는 등 다양한 편법이 자행되었다.

 

임오군란도 정부가 구식군인들에게 쌀대신 모래를 급료로 주니 폭동이 발생했던 것이다. 정부나 정치인들이 백성들을 기만하는 것은 어제 오늘이 일이 아니다. 이전부터 그렇게 행해져왔다. 

 

당시도 정치인들은 환곡 받기를 거부하는 백성에게도 강제로 배부하거나, 이자를 돈으로 내도록 하여 아전들이 부당한 이익을 취하기도 하였다. 이를 환정의 문란이라 한다.

 

그야말로 조선후기정부는 썩을때로 썩었던 것이다. 땅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백성들의 눈물을 닦아주지 못했다. 결국 하늘을 추구하는 사람들만이 한국백성들의 한과 눈물을 씻어줄 수가 있었다. 

 

조정은 동학농민들을 죽이기 위해서 일본과 청을 끌여들였다. 거창양민, 여순양민, 제주양민은 좌익소탕을 빌미로 정부가 백성들을 죽였던 것이다.

 

좌익은 소탕의 대상이지만 백성들은 보호의 대상이었다.이념과 땅, 세속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항시 교회를 파괴하고 생명을 살상해야만 희열을 느끼는 사람들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다. 이단감별사들은 정적을 교리로 죽이고, 뉴스앤조이나 CBS 같은 기독교 사회주의언론들은 대형교회를 파괴하고, 좌우익파들은 이념으로 서로 죽여야 희열을 느낄 수 있었다.      

 

삼정문란은 부패한 관리들이 백성들을 죽이는 정책이었다. 이것은 조선 후기 숱하게 발생한 민란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 1811년 홍경래의 난 이래로 1862년까지 70개 군 이상에서 농민들이 들고 일어났다.

 

1863년(철종 13년) 2월에 일어난 진주민란은 삼남(三南: 경상, 전라, 충청) 각지로 퍼져나갔으며, 1860년대는 농민항쟁의 폭발 시기였다. 동학난이 발생하기 30년 전부터 농민들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고흥의 동학과 향리

 

고흥도 유사한 상황으로 1862년 삼정문란에 따른 농민봉기가 발생했고, 이로인해 1894년 동학의 수용은 자연스러웠다. 고흥에서는 약 3,000여명이 들어 일어나 금구집회와 보은집회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고흥의 동학도들은 고흥에서 인정을 받지 못하였다.

 

고흥의 동학도들은 1895년 6월에 봉기하여 현청에 들어가 향리를 구타하고 낙원, 하동을 거쳐서 남원성에 입성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고을 향리들은 동학에 대해서 반대했고, 폭력적이지 않은 선교사들의 복음에 적극적이었다. 향리는 조선시대의 하급 공무원이었다.

 

향리는 지방관청에 속하여 해당 지방의 행정을 맡아 보면서, 지방사정에 다소 생소한 중앙에서 파견된 지방관을 보좌하면서 실무를 담당하였던 토착적이고 세습적인 공무원에 해당하는 하급관리를 말한다. 향리 정도면 당시는 지식인이었다. 

 

향리들은 선교사들이 폭력을 행하지않고 오히려 의료선교를 하고 새로운 복음을 알려 영적 도움을 주려고 하였기 때문에 기독교에 귀의하게 되었다. 그래서 고흥의 기독교는 다른 어떤 지역보다 동학에 반대했던 향리 등을 통하여 복음이 전파되었다.  

 

1894년에 금구집회나 보은집회에 참여하였던 농민군들이 귀항하여 흥양읍성을 점령하기 위해 관군과 전투를 벌였지만 동학도들이 패퇴하고 만다. 이 당시 향리들이 수성군으로 되어 동학교도들과 싸움을 벌였다. 당시 패퇴한 동학도들은 일본군들과 관군에 의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 

 

레이놀즈의 선교

 

이 당시 레이놀즈는 금산(거금도, 절이도)을 거쳐서 4월 29일 흥양읍성에 들어와 선교활동을 하였다. 이처럼 선교사들의 선교활동은 동학이라는 혁명시에 이루어졌던 것이다. 즉 선교사들은 순교를 각오하고 고흥에 복음을 전했던 것이다. 

 

레이놀즈는 위험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보성의 인근지역인 동강에서 복음을 전했는데 향리층들이 복음을 쉽게 수용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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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흥읍교회를 담임했던 목치숙의 아버지도 향리출신이었다. 레이놀즈가 동강면에서도 촌로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는데 양반촌의 촌로들이 환대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당시 레이놀즈가 여관에 묵었는데 이미 여관주인이 성경책을 부산에서 직접 구입하였다고 하여, 1894년 이전에 복음이 동강에 전파되고 있었던 것이다. 

         

고흥지역에 영적인 생명을 주기 위하여 제일먼저 복음을 전파한 첫 선교사는 레이놀즈(William D.Reynolds. 1868-1951)와 드류(Alessandro D. D.res, 1859-1956)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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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놀즈와 드류는 1894년3월 20일부터 5월12일까지 호남지역 답사여행을 하면서 당시 고흥에서 복음을 전했다. 레이놀즈와 드류가 1984년 동학난이 한창일 때 4.28 고흥에 도착하고 복음을 전했다. 1897년 유진벨과 오웬이 2차 선교답사여행을 하면서 한약방을 하던 신우구(고흥군외 최초의 신자) 를 중심으로 첫 예배가 이루어졌다.  

 

그 이후에도 1905년 오웬 선교사와 조사 등이 와서 복음을 전하자 마을 사람들이 1906년에 고흥군 옥하리에 교회를 세우게 되었다. 그는 고흥의 지식인과 한약사, 민중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였다.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상권,170)는 고흥읍교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1906] 고흥군 옥하리 교회가 성립하다. 선시에 선교사 오기원 조사 오태욱의 전도로 신우구, 박용섭, 이 춘흥, 이정권 등이 믿고 사저 혹 서당에서 회집예배하니라  

 

고흥의 향리들

 

향리는고흥의 지식인들이었다. 향리출신이면서 폭력적 성향을 보인 동학보다 서구인들이 전하는 복음에 관심을 보였다. 가장 중심인물은 신우구였고 돈이 많은 한약사였다. 

 

고흥의 3대 부자였던 신우구가 복음을 받아들이면서 선교가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고흥교회 설립의 1등 공신은 신우구였다. 그의 집에서 개척교회를 시작하였고, 그가 선교를 위해 재정적인 일을 감당하기도 하였다. 

 

  신우구

 

거금도의 기독교 수용

 

금산면(거금도)의 기독교수용은 한익수와 선영홍이 1906년에 서울에서 기독교를 접하고 성경을 구입해 금산면 최초의 신자가 되기도 하였다. 이들이 서울에 올라갔던 이유는 계속된 가뭄으로 기근이 심한 상태였는데 조정은 계속 조공의 독촉으로 섬마을의 삶은 비참해 졌다. 돌산군청에도 탄원을 하였지만 소용이 없자, 한익수 집강(면장)과 선ㅇ영홍참봉이 금산면 주민들을 대표하여 직접 경성에 올라가 신문고르 울리고 어려움을 호소하였다. 이들의 호소로 인해 조정의 세금은 삭감되었다.

 

이 두사람은 경성거리를 구경하다가 길거리에서 미국선교사를 만나 복음에 대한 얘기를 듣게 되었다. 한학에 조예가 깊고 신학문에 관심이 많았던 두 사람은 선교사가 전하는 복음을 듣고 감동을 받아 개신교 신자가 되었다. 거금도로 돌아올 때는 선교사들이 준 한글로 번역된 성경을 수백권을 받아가지고 주민들에게 나눠주면서 복음을 전했다.    

 

처음에는 선영홍의 집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선영홍이 갑자기 예수를믿지 않겠다며 선언하자, 신흥이 료고히가 세워지게 되었다. 그것이 1907년이었다. 성영홍은 제사문제를 이유로 형이 자식도 없이 일찍사망하는 바람에 차암이던 선영홍이 제사로 집안을 이끌어야 했기 때문에 기독교를 떠나게 되었다.

 

금산면(절이도)에서는 신흥리 교회가 1907년에 세워지고, 1908년에 신평리 교회(명천교회)가 세워진다. 쉽게 복음이 전파될 수 있었던 것은 대부분 신도들이 선영홍의 소작농이 었기 때문이다. 지주출신 오석주가 신평리 교회를 세운 것도 대부분 소작농들이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순조롭게 교회가 성장할 수 있었다. 당시 재정을 담당한 선영홍은 흥양목장의 항리출신이었다.

 

  금산(거금도, 절이도)의 신평리 교회(현명천교회)

 

레이놀즈가 쓴 일기에는 '져리도'가 나온다. '져리도'는 고흥 금산(거금도)의 옛지명이다. 도양읍인 녹동은 고흥반도의 서남쪽 끝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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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흥의 향리와 자제들

 

이처럼 고흥은 부자들이나 지식인들이 복음을 접하면서 교회가 많이 세워지게 되었다. 

 

특히 3.1운동을 경험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다행히 향리층의 자제들이 부모가 감옥에 갇혀있을 때, 기독교청년회를 조직하고 의료사업과 야학을 전개하고, 선교를 해 나갔다. 초기 신자들 중에 목회자들이 많이 배출되었고 이들이 중심이 되어 신사참배 운동이 조직적으로 전개되기도 하였다.

 

고흥의 기독교가 순조롭게 전파될 수 있었던 것은 향리층이라는 지식인들이 동학에 반대하면서 기독교를 수용하고 그들이 감옥에 갇혀있을 때 그들의 자제들이 움직이면서 포교활동이 확산되었다.  고흥읍교회는 고흥에 복음이 전파된 최초의 교회로서 고흥에서 어머니교회로서 역할을 한다.    

   

  고흥읍교회


고흥읍교회 당회록은 첫신자를 신우구, 목치숙, 박용섭, 박무웅, 설준승, 이춘흥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이 1901년 4월 고흥읍 옥하리 있던 한약방 2층에서 첫 예배를 드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첫 창립멤버였던 목치숙은 나중에 평양신학교 재학중에 3.1운동 만세운동에 개입하다가 3년간 옥고를 치룬다.

 

목치숙과 목일신

 

훗날 목치숙은 고흥읍 교회에서 사역하고 아들 일신은 부설 유치원에 다녔다. 아들은 교회에서 배운 신학문의 영향을 받아 훗날 400여곡이나 동요를 발표하는 시인이 되었다. 동요 [자전거]와 [누가누가 잠자나]는 어렸을 때 불렀던 국민동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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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일신이 고흥 흥양보통학교(현 고흥동초교) 5학년 때  [자전거]라는 동요 가사를 작사해 1932년 기독교 어린이잡지 '아이생활'에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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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르릉 찌르릉 빗켜나세요/자전거가 갑니다 찌르르르릉/저기 가는 저 영감 꼬부랑 영감/어물어물 하다가는 큰일납니다

 

 찌르릉 찌르릉 빗켜나세요/자전거가 갑니다 찌르르르릉/오불랑 꼬불랑 고개를 넘어/비탈길을 스스륵 지나갑니다

 

 찌르릉 찌르릉 이 자전거는/울 아버지 사오신 자전거라오/머나먼 시골길을 돌아오실제/간들간들 타고 오는 자전거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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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넓고 넓은 밤하늘엔/ 누가 누가 잠자나/ 하늘나라 아기별이/ 깜박깜박 잠자지

 깊고 깊은 숲 속에선/ 누가 누가 잠자나/ 산새 들새 모여 앉아 / 꼬박꼬박 잠자지 <1965년 교과서>

 

부천에 가면 목일순의 [자전가]시가 쓰여진 비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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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1913년 고흥에서 태어나서 1927년 처음으로 동아일보에 [산시내]를 발표했고, [자전거]는 5학년 때 발표했다. 1929년에 동아일보에 '참새'를 발표하고, 1930년에는 [시골], 1931년에는 [물레방아]가 당선되는 등 약 400편의 동요를 지었다. 

 

1956년 초등학교 교과서에는 [비누방울]이 실렸고, 음악교과서에는 [자전거], [누가누가 잠자나]가 실렸다. 그 이외 대중가요, 군가 등을 작사하였고 배화여고 교가까지 작사하였다. 목일순은 광주학생의거에는 감옥에 1개월 갇혀있으면서도 손바닥만한 종이에 몽당연필로 작품을 만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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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일신은 김일과 유제두, 박지성 달리 고흥출신으로서 문예의 힘이 있었다. 고흥은 체육인뿐만아니라 문예인도 배출하였다. 그러나 그 역시 고흥의 육체적인 힘을 무시하지 못하였다.

 

고흥읍교회가 배출한 위대한 동요작가였지만  이화여중고에 교사로 재직하던 1950년대에는 탁구선수이자 코치, 감독으로 위쌍숙 위순자 자매를 탁구 국가대표로 키웠고, 1960년에는 배화여중고 연식정구부 감독으로 동아일보 주최 제38회 여자연식정구대회에 출전한 적도 있을 정도로 선천적인 고흥의 물리적 힘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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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이기풍

 

이외에 고흥읍교회는 이기풍목사가 목회를 하던 곳이기도 했다. 순교자 이기풍(1865∼1942)목사는 1924년5월에 고흥읍교회에 부임했다. 그는 고흥 지역에 여러 교회를 세워 활동하다가다  5년10개월 만에 총회 전도부 파송에 따라 제주도 선교사로 가게 되었다. 고흥읍 당회록에는 이기풍목사의 이름이 쓰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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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풍목사는 1938년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체포됐고 이때 받은 고문 후유증으로 여수 금오도 우학리교회를 사역하다가 별세했다. 

 

 초기의 우학리 교회

 

 

  최근의 우학리 교회

 

이처럼 고흥에는 걸출한 인물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체육인으로는 김일, 유제두, 박지성, 문예인으로는 목일신을 배출했고 목회자로서는 이기풍목사를 배출하기도 했다. 이와같이 고흥읍교회는 1894년 레이놀즈, 드류, 1905년 오웬선교사의 도움으로 역사적인 교회가 개척되었고, 목회자들은 신교육과 신문명에 힙입어 3.1운동에 가감하거나 신사참배에 반대하여 신앙을 지켰다.

 

목일신도 항일의식을 갖고 광주학생의거에 가담하였으면서도 소사 방정환처럼 아이들을 위한 많은 동요를 작사하여 아이들에게 생기를 불어주었다. 고흥출신들은 근대화된 문명을 맛보면서 일부는 체육인으로, 일부는 항일투쟁으로, 일부는 시인으로서 국위를 선양했다. 모두 한민족의 정신과 기를 살리는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고흥군 100년 이상된 교회들

 

1906년에는 고흥읍교회, 1907년에는 신흥리 교회,1908년에는 신평교회, 1910년에는 주교리 교회, 1915년에는 오천교회, 길두교회, 1918년에는 유둔리 교회(무만리교회에서 분립), 1920년에는 대덕리 교회(주교리 교회에서 분립), 1921년에는 관리교회, 내발리 교회, 동정리 교회, 1922년에는 송천리 교회, 1923년에는 한천교회(고흡읍교회에서 분립)가 세워진다.

 

열정적인 선교사 오웬

 

고흥에는 100년이상 된 교회가 11개 이상이다. 선교사 오웬이 죽기 2년전 1906년에 담당한 지역은 광주, 화순, 동복, 능주, 장성, 남평, 구소, 신창리, 용기, 흥양군, 고흥이다. 그러므로 오웬의 영향이 고흥까지 미쳤던 것이다.

 

오웬은 장거리 여행에 대해서 하루에 약 100리 이상 이동하였다고 기록하였다.

 

"나는 지난 해에 남쪽으로 약 100리 또는 하루의 이동거리를 여행하였다. 그 일은 큰 복을 받고 있다. 나는 거기서 도착하려고 약 12시간 동안 말위에 있었다고 느꼈다. 그러나 나의 마음은 한 새로운 지역의 첫 열매들을 보게 되어 기뻤다."

 

그는 하루에 12시간 이상 말을 타고 전도하는 열정을 보여 1909년 장흥에서 과로로 인해  폐렴에 걸려 광주에 3일만에 당도하였지만 그만 목숨을 잃고만다. 그러나 호남신학대학교 동산에 유진벨, 서서평과 함께 안장되어 있다.  오웬이 있었기 때문에 고흥가 전넘 동남부에 100년이상 된 교회가 많이 세워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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