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성 선양사 서훈자들과 대통령의 역사성의 문제

이념 역사관은 배제하고 항일역사관에만 멈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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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0-10-31 [2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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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성 서재필 기념공원에 가면 산양사가 있다. 선양사는 대한민국을 빛낸 30명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서훈했다. 그 중의 5명이 중국인이다. 공산활동을 한 이동휘나 여운형까지 서훈을 하였지만 김원봉은 서훈하지 않았다.

 

중국인들이 서훈을 받은 이유는 임시정부를 승인하거나 돕고, 한국독립을 위하고, 국공합장을 통해서라도 항일투쟁에 함께 한 사람들이다. 중국인들은 공산당이 아니라 국민당에 속한 사람들이다. 김원봉은 북한정권에서 훈장도 받았지만 1958년에 북한에서 숙청되었다. 그는 광복군 부사령까지 역임하였지만 월북을 한 이유로 서훈에서 제외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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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에 25명은 한국인이고 5명은 중국인이다. 한국인은 김구, 안중근, 서재필, 이동휘, 이봉창, 윤봉길, 조만식, 이승만, 민영익, 안창호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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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건국에 공헌을 한 5명은 모두 중국인이다. 국외 대한민국장을 수여받은 사람들이다.  손문, 장개석,  송미령, 진과부, 진기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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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문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정식 승인하고 적극 지원하였다. 그는 삼민주의를 주장하였다.  '삼민주의'(三民主義)는 민족(民族)주의, 민권(民權)주의, 민생(民生)주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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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미령은 장개석의 부인으로서 대한민국의 독립을 적극 지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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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개석은 중국 국민당총재, 삼민주의청년단 단장, 중화민국총통 등을 역임했다. 장개석은 중국공산당과 합작하여 항일운동을 했고, 임시정부를 적극 지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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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과부는 중국 국민당원으로서 중국공산당의 숙청작업을 적극 진행하고 광복군과 함께 항일운동을 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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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기미는 신해혁명 이후 상하이 도독(都督)에 이어 공상총장에 취임하였으나, 1913년 제2차 혁명으로 위안스카이에게 쫓겨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1915년 귀국하여 위안스카이를 반대하는 군사활동을 벌이다가 상하이에서 암살당하였다. 사후 중국국민당이 펴낸 《천잉스선생문집》이 있다. 1968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한민국의 독립을 지원한 공이 인정되어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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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공산당소속은 없다. 모두 국민당 소속이다.

 

대통령의 외눈 역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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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훈법은 대한민국에 뚜렷한 공적을 세운 사람에게 수여한다고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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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봉은 1898년에 밀양에서 태어나 3 · 1 운동이 일어나던 1919년에 중국으로 망명해 13명의 청년들과 함께 의열단을 만들고 단장이 되었다. 의열단원들은 이듬해부터 국내에 들어와 일제의 높은 관리들과 친일파를 암살하거나 관청을 폭파하는 등 의거 활동을 시작했다.

 

이때 나석주, 김상옥 등 많은 청년들이 일제에 피해를 입히는 의거를 벌였다. 하지만 의거만으로는 독립을 앞당기는 데에 한계가 있음을 깨달은 김원봉은 강력한 군사 조직을 만들어 싸울 것을 결심했다.

 

그는 중국 국민당의 도움을 받아 당시 중국에 있던 5개의 독립운동 단체를 모아 한국 민족 혁명당을 만들고, 본격적인 항일 무장 투쟁 조직인 조선 의용대도 창설했다. 조선 의용대는 중일 전쟁에서 큰 성과를 거두어 중국에서도 실력을 인정받는 부대가 되었다.

 

일부 조선 의용대원들이 일본과의 전투를 위해 부대를 떠난 뒤에는 남은 대원들을 이끌고 한국광복군에 들어갔다. 이후 대한민국 임시 정부 군무부장과 광복군 부사령관 등을 맡아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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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으로 간 김원봉

 

그러나 8 · 15 광복 후 국내로 돌아온 김원봉은 신탁 통치를 두고 좌익과 우익이 대립할 때 좌익 계열에 참여했다.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이 추진되자 이에 반대하면서 1948년에 북한으로 갔고, 북한의 고위 관리인 노동상에 오르는 등 정치 활동을 벌였다. 하지만 1958년에 숙청(반대파를 없애는 일)당해 세상을 떠난 것으로 추측된다. 10년동안 북한정권을 위해서 일한 공으로 보훈처는 서훈에서 제외되었다.

 

대통령의 역사관은 항일역사관에서 그친 외눈 역사관이다.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항일역사관에서 머물고 있기 때문에 좌우의 대립인 냉전역사관에 따른 공적은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기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백선엽에 대해서는 조문을 하지않은 것이다. 백선엽은 친일이었지만 반공이었고, 김원봉은 항일이었지만 친북이었다. 문대통령은 항일이지만 친북을 선택한 것이다. 백선엽대신 김원봉을 선택하였다. 반제국주의적인 항일역사관인 외눈역사관에 멈추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친일파의 후손인 민주당 의원들도 상대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대한민국의 대통령이라면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대통령선서를 했으면서 백선엽대신 김원봉을 선택한 것은 역사관, 법치관의 부재에서 오는 것이다. 민주공화국에서 북한정권에 협력한 사람들이 설 자리는 없기 때문이다. 

 

선양사에서 국외사람으로서 서훈을 받은 사람들은 중국공산당이거나 공산당에 협력한 사람은 없다. 단지 제국주의나 일본에 대항하기 위하여 국민당과 공산당이 국공합작을 한 적은 있다. 그러한 면에서 김원봉을 서훈대상자로 선택한 것은 보편적 역사관의 부재에 기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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