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신앙유산답사기 (진도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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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0-11-04 [01:39]

 

최근 진도를 가면 트롯트가수로 유명한 송가인의 마을이 있어 많은 관광객들이 그의 집을 방문하고 있다. 지자체에서도 송가인의 마을을 만들어 진도알리기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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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진도는 얼마전까지만해도 세월호의 침몰로 인해 눈물의 섬이었다. 트롯트의 즐거움도 있지만 세월호의 눈물도 있는 섬이다.

 

세월호사건은 너무나도 충격적인 사건이어서 정권까지 바꾸어 놓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팽목항에 가면 학생들의 애도를 비는 리본만이 끝도 없이 걸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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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 점점 침수해 들어가도 누구하나 아이들을 탈출하라고 말한 적이 없고 오히려 배에 남아있으라고 안내방송을 하여 아이들은 생지옥에 수장되었고 선장과 일부 선원들만 몰래 빠져나갔고 헬기와 배에 탄 해경들은 배안에 들어갈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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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신부들이 애도미사를 드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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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에서도 당시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100회 총회장이었던 채영남 목사가 유가족을 방문하여 예배를 드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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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진도는 이전에도 슬픈 역사가 있었던 곳이다. 삼별초가 항쟁했던 곳이다. 삼별초는 세계를 정복했던 징기스칸이 속한 몽고에 대항하여 자그만치 28년 동안 항쟁을 벌였을 정도로 강력한 군대였다.

 

삼별초는 1219년(고종 6) 최충헌의 정권을 계승한 최우(崔瑀)가 방도(防盜) 등 치안유지를 위해 설치한 야별초(夜別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별초란 ‘용사들로 조직된 선발군’이라는 뜻이다.

 

그 뒤 야별초에 소속한 군대가 증가하자 이를 좌별초 ·우별초로 나누고, 몽골 병사와 싸우다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한 병사들로 신의군(神義軍)을 조직, 이를 좌 ·우별초와 합하여 삼별초의 조직을 만들었다. 즉 좌별초, 우별초, 신의군이 합하여 삼별초를 만든 것이다. 

 

삼별초는 국가의 원래 군대는 아니고 무신정권에서 시작된 사병의 수준이었다. 당시 무신정권의 정치가들은 막강한 사병조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삼별초는 무신정권의 발로였다.

 

고려왕이었던 원종은 1270년에 몽고군의 침입을 받아 치욕적인 강화조약을 맺고 개경으로 환도하자 이에 반대한 삼별초군은 강화파에 대해서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그들은 항쟁파였다. 

 

그래서 그들은 몽고와 화친한 강화파와는 달리 배 1,000척을 끌고 진도까지 내려가서 투쟁을 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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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고는 해상에 약하기 때문에 삼별초는 섬을 택하였다. 실제로 처음에 삼별초는 몽과와 싸워 2번 패배하고 4번 승리하였을 정도로 그 기개가 대단했다.   

 

  몽고와 배중손과의 항쟁

 

 

삼별초는 원종의 육촌인 온(溫)을 왕으로 추대하고 진도에서 항거하였고, 고려의 장군 배중손(裵仲孫)은  용장성에서 대몽항쟁(1270~1271)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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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별초는 무신정권의 전위부대로서 다분히 국가의 정규군이라기 보다는 사병적인 요소가 있었다. 그러나 항몽전에서는 그 선두에서 유격전술로 몽골병을 괴롭혔으며, 무신정권이 무너지고 몽골과 강화(講和)가 성립되고 고려정부가 개경으로 환도하자 개경정부 및 몽골과 대항하여 항쟁하였다. 무신정권의 사병들이 최후항쟁을 하였던 것이다.

 

배중손 등은 진도에 성곽을 구축하고 장기적인 항전태세를 갖추고, 해상으로 수송되는 세공을 노획하여 재정에 충당하기도 했고, 전라도·경상도 백성들과 멀리 개경의 관노들까지 호응하여 동조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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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별초는 배중손을 지도자로 하여 고려 중기 당시 세계최강의 몽골군대에 여러 차례에 걸쳐 결사항전을 하였고, 중앙 정부가 몽골에 항복한 상황에서도 삼별초를 중심으로 한 장병들의 항전 또한 세계 역사에 유래가 없는 일이었다.

 

삼별초는 한동안 남해지방의 세금을 거두어 장병을 훈련시켜 본토회복을 위한 전진기지로 삼았으나, 몽골에 항복한 고려의 원종과 몽골 연합군에 의하여 용장산성이 함락하고 배중손은 제주로 가기 위해 굴포 항구에 왔다가 배를 타지 못한채 결국 최후를 맞이하였다.

 

동학교도들도 조선.청일연합군에 의해 망했듯이 삼별초도 나몽연합군에 의하여 패배하였던 것이다. 신라도 삼국통일을 하기 위해 당을 끌어들였고, 고려는 삼별초를 치기위하여 몽골을 끌어들였고, 조선은 동학농민을 죽이기 위하여 청일을 끌어들였다. 민족의 비운이었다.

 

진도선교

 

미국의 선교사들은 이방인을 끌여들여서라도 같은 민족을 살상하는  조선과 달리, 조선을 살리기 위하여 복음을 들고 왔던 것이다. 예수의 정신은 죽은 자도 살리는 것이었다. 경제, 교육, 건강, 종교, 전쟁으로 죽은 한민족을 살리는 것이 그들의 사명이었다.

 

선교사들이 공식적으로 진도를 방문한 시기는 1905년이었고,  당시 진도를 방문한 선교사는 프레스톤, 오웬 , 의사인 다니엘(T. H. Daniel)로서 이들은 서울에서 유배 온 젊은 선비를 만나 전도했고, 이 사람들이 예배를 시작하여 1905년 자생적으로 분토리 교회가 설립되었다. 

 

분토리 교회를 설립했던 정경숙, 김경원, 김경오는 이미 도정의라는 사람으로부터 전도를 받아 자생적으로 예배를 하다가 신도가 70명에 달하자 당회를 조직하고 정경숙을 장로로 옹립하게 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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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정의는 진도의 첫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도정의라는 사람은 분토리교회뿐만아니라 해남의 선두리교회도 창립을 했다. 현재 분토리교회는 진도초대교회로 개칭이 되었다.     

 

  진도 초대교회(분토리교회)



1926년도의 당회록은 다음과 같다.

 

  분토리교회 당회원

 

하지만 인력 부족과 협력자들의 부족으로 선교가 활발하게 진행되지는 못하였다. 1909년에는 맥컬리 선교사가 간호사인 코르델(Miss Emily Cordell)과 결혼하면서 부모에게 선물로 받은 배를 타고 포싸이트(W. H. Forsythe) 의사와 함께 진도 인근의 섬을 돌며 본격적인 선교 활동을 펼쳤다.

진도는 선교사들의 선교열정으로 인해 1905년에 분토리교회, 1919년에 중앙교회, 1921년에 금갑교회, 1927년에 고군중앙교회, 1931년에 중굴교회, 1946년에 벽파교회, 1952년에 의신중앙교회 등이 세워졌다. 2006년 현재 진도에는 본도에 75개의 교회가 있으며 인근 섬까지 포함하면 105개의 교회가 있다.

 

금갑교회도 1906년에 자생적 교회로서 세워졌다.

 

  금갑교회(1921년)



 진도의 순교자들


박석현 목사는 1901년 10월 19일 진도읍 교동리에서 태어나 진도소학교를 졸업했다. 1919년 3·1운동 때에 진도 청년책임자로 참가했다가 목포형무소에서 6개월간 복역하기도 했다. 이후 피어선신학교와 평양신학교를 졸업했다.

 

1938년 평양신학교 졸업과 동시에 목사 임직을 받고 나주읍교회에 부임했고 1949년 4월에는 광주 양림교회의 목회자로 부임했다. 하지만 한국전쟁 발발 후 1950년 9월 27일 영암에서 친북 세력들에게 잡혀가 가족과 함께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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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교회 담임목사인 김수현 목사와 박해운 장로도 한국전쟁 당시에 순교했다.

 

  진도중앙교회(1919)

 

진주중앙교회 7대 목사였던 김수현 목사는 전라북도 부안 출신으로 일제강점기에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가담하여 대구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인민군이 전라남도를 장악한 후 1950년 6월 26일 곧바로 처형되었다.


1950년 8월 24일 박종해 안수집사(후에 장로 추서)는 한국전쟁 때 진도군 의 신면에 피신해 있다가 북한에 납치 되었다. 

 

벽파교회

 

  벽파교회(1946)

 

벽파교회의 오교남 전도사도 친북 세력들에게 붙들려 23세의 나이에 순교하였다.

 

 

  오교남 전도사(1927-1950)



북한에서의 종교 탄압은 1948년 9월 북한 정권이 수립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북한 정권의 궁극적인 목적은 교회를 청산하고 종교를 말살하는 단계까지 이르게 하려는 것이었다.

 

6·25 전쟁 중 북한군과 공산당에 피살당한 기독교 교직자는 이름을 확실히 알 수 있는 사람만 174명이 확인되었고, 납북당한 교직자도 184명으로 피살과 납북 피해자는 모두 358명에 이른다.

 

좌익의 영들은 섬까지 찾아가서 선량한 신도들을 살상하는데 열을 올렸다. 전남 서쪽 바다에 있는 荏子島(임자도)에서도 100명, 혹은 150명씩 구덩이를 파고 양민과 교인을 학살했다. 10월5일 새벽 임자진리교회 이판일 장로의 일가족 13명이외에 35명이 집단 학살당하였다. 

 

 

  임자 진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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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논산의 병촌교회에서는 한 살짜리 어린아이부터 육순의 노인에 이르기까지 60여 명의 교인들을 집단으로 학살했다(박완, 「실록 한국기독교 100년」 제6권, 선문출판사, 1973).

 

1950년 7월, 이 마을에선 인민군의 무자비한 폭력에 비명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불리해진 인민군이 마을을 장악해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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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예수의 영을 가진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영적, 정신적, 물리적으로 살리려고 노력을 하였지만 좌익의 영이나 이념에 편승한 사람들은 사람을 죽이는데 희열을 느꼈다. 사단이  계명을 통해 역사하듯이 이념을 통해서 역시했다.

 

오늘날에 좌익의 영을 가진 사람들은 예수의 영을 가진 사람을 죽이는데 앞장서고 있다. 특히 좌익의 영을 가진 언론들은 예수애보다 동성애를 중시하고 예수의 영을 가진 사람들과 교회를 파괴시키는데 앞장을 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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