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신앙유산답사기 (구례편)

빨치산과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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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0-11-05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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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구례는 지리산 남쪽 기슭에 자리한 소박한 도시다. 해발 1000m 이상의 20여개 산봉우리가 넉넉하게 펼쳐지고, 섬진강이 마을 앞으로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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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구례에는 1000년 고도의 유명한 화엄사라는 절이 있다. 화엄사는 전라남도 구례군 마산면 황전리에 위치한 사찰로 대한불교 조계종 제19교구 본사이다.

 

삼국 시대에 창건되었으며, 지리산 국립공원 안에 있다. 544년에 인도에서 온 승려 연기가 창건한 것으로 화엄경의 두 글자를 따서 절 이름을 지었다. 선덕여왕 12년(643년) 자장이 증축하여 석존사리탑·7층탑·석등롱 등을 건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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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같이 구례에는 지리산이라는 민족의 명산과 경상도와 경계를 이루는 섬진강이 젖줄처럼 흐르고, 고도의 아름다운 사찰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구례는 다른 한편 1948년부터 1953년까지 빨치산이 활동하였던 이념의 고장이기도 하다.  

 

빨치산으로 인해 교회가 피해를 당하고 구례중앙교회의 이선용목사가 순교를 당한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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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구례 중앙교회 양용환목사는 신사참배로 일제에 의해 순교를 당했고, 이선용목사는 1950년 12월 29일 빨치산에 의해 희생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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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용목사는 조선신학교를 졸업해서 1942년에 목사안수를 받고, 온성교회 목회하면서 일본에서 병아리를 주문해 농가에 분양하고 양돈을 통해 자영 농촌진흥에 힘쓰는 등 농촌운동을 통해 농촌을 살리기도 하였다.

 

이목사는 1948년 10월 여수순천반란사건당시 피난가지 않고 교인과 반란군에게 전도하고 국군이 들어왔을때 예수믿은 반란군 등을 구출하기도 했고, 오해받는 주민들을 자기 옷을 벗어 입혀주면서 눈물로 기도하여 군중을 감동시키고, 당일의 사형자들을 위해 보증을 서서 전원 석방하기도 했다. 

 

6.25가 발발하자 군민이나 교인들의 오해로 불가피하게 부산으로 피난하여 빈민들을 위해 희생을 하기도 했다. 1950년 10월 서울이 수복되자 구례읍 중앙교회로 돌아와 교회복구를 정상화 하였다.

12월 9일 교회건축관계로 순천노회에 상의하러 가던중 동행한 국회위원 이판열집사와 이집사의 딸 그리고 마산리교회 정관백전도사와 동행중 5명이 모두 산고개를 넘어서려는 순간 산에서 몰려나온 지리산 빨치산들에게 총살을 당했다. 당시 나이가 43세였다.  

 

그의 순교비가 화엄사와 구례읍가는 세갈래 길에 우뚝 서있고 순천노회 앞 정원에 있다. 이처럼 구례는 이념의 고장이기도 하지만 눈물의 지역이다.

 

이현상

구례는 여순사건으로 폐색이 짙은 구빨치산과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이미 남부지방까지 내려왔던 공산당들이 북한으로 피신하지 못하여 지리산으로 들어간 신빨치산이 활동했던 지역 중의 하나이다. 당시 지리산에서 빨치산을 주도한 것은 이현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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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상(1905년 9월 27일 ~ 1953년 9월 17일)은 일제 강점기의 공산주의계열 독립운동가, 사회주의자, 노동운동가이며, 해방 후에는 남조선로동당의 간부로 지리산 일대를 중심으로 파르티잔 활동을 주도했다.

 

이현상은 1906년 전북(지금은 충남) 금산(錦山)에서 태어났다. 전주이씨로 이른바 양반의 집 자손인데 면에서 첫째 가는 부잣집 4형제 가운데 막내였고 부유한 가정에서 자라났다. 

 

그는 보통학교를 나와 고창에 있는 고창고등보통학교에 들어가 2학년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가 중앙고등보통학교에 편입한다. 그러나  졸업반인 5학년 때 순종  장례식에 6·10만세운동이 발생하였다. 

 

이현상은 서울시내 고보생들을 이끌고 시위를 주도하다가 왜경에 체포되어 6개월간 감옥살이를 하다가 공산주의 사상을 배우게 된다. 그는 밀항선을 타고 상해로 가지만 임시정부 난맥상에 실망하고 귀국한 이현상은 보성전문학교 법과에 들어갔으나 4개월 만에 그만둔다.

 

1928년에 이현상은 조선공산당에 입당하고 고려공산청년회에 들어가 학교 동맹휴학을 조직하다가 제4차 조선공산당사건으로 검거되어 징역 4년을 언도받는다. 서대문형무소에서 만나게 된 것이 이재유와 20살 어린 나이 때부터 이미 탁월한 조직가 면모를 보이던 김삼룡이다.

 

1933년부터 이재유그룹으로 서울 동대문과 용산에 있는 각급 공장에 적색노조를 조직하기 위한 준비운동을 하다가 11월 ‘이재유그룹 검거사건’에 걸려 7년간 복역한다.

 

1940년 ‘경성콤그룹’에 들어 인민전선부를 맡아보다가 10월 체포되어 2년간 미결수로 있다가 병보석으로 나와 다시 지하투쟁에 들어간다.

 

해방이 되면서 남로당 노동부장이 되었고, 여순사태가 터지면서 중앙당 결정에 따라 지리산으로 들어가 남부군 곧 남조선 인민유격대 총사령관이 된다.

 

1946년 말에는 박헌영과 이주하, 김삼룡, 이현상 등이 핵심 간부를 맡은 남로당도 결성하였다. 그는 빨치산의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지리산을 중심으로 5년 동안 결사항전을 하고 끝내 북에서 내려보낸 공산당에 의해서 살해가 된다. 군경은 그를 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지리산 빨치산과 군경 토벌대는 무기에 있어서 현저한 차이가 났다. 국군은 최신무기 네이팜탄을 사용했지만 이현상유격대 주무기는 갑오년 김개남(金開南) 장군 때 쓰던 화승대에 기껏 삼팔식장총이었다.

 

이현상은 1953년 9월 17일에 죽지만  경찰과 군 어느 쪽에서도 그를 쏘지 않았다. 계급해방과 민족통일을 위하여 신 벗을 사이 없이 밤을 낮 삼아 뛰어다녔던 이현상을 죽인 것은 남로당관계자들을 숙청하려는 북에서 직접 내려 보낸 특수공작대일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북한에는 이현상의 비석이 있다.  박헌영, 김삼룡과 이현상은 남로당을 이끈 지도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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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사건

 

지리산에 빨치산들이 들어가게 된 근원적인 이유는 여순사건때문이었다.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된지 2개월만에 여순사건이 발생했다. 여순사건은 제주4.3사건의 여파로 인해서 남로당 일부가 군에 들어가 반란을 주도함으로 인해서 발생했다. 

 

1948년 10월 19일에 여수에 주둔 중이었던 14연대 군인들이 제주도로 출동하여 자국민을 진압하라는 이승만 정부의 명령을 거부하고 김지회와 지창수를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여순사건은 일부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킨 명분은 동족상잔이 싫다고 말했지만 사실 저들은 소비에트라는 남로당 소속 세포 조직의 조직원들이었다.

 

최종적으로 9일만인 10월 27일에 진압된 사건으로, 반란군과 진압군 양측에서 저지른 민간인 학살로 논란을 빚었다.

 

좌익의 이념의 영이 깃든 사람들이 우익인사를 죽이고 여순을 무력으로 점령하였다. 이러한 사실만 보아도 6.25남침은 예비되어 있었던 것이다. 대구폭동사건을 기회로 여순10.19 사건은 좌익들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사건이다.

 

정부측에서는 여수에서만 관민 1,200명이 학살당하고 1,150여명이 중경상을 입었다고 발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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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통계연감을 보면 한국전쟁 기간 인민군과 좌익에 의해 학살당한 민간인은 12만2천여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군경 등에 의한 민간인 학살의 10분의 1 수준이다.

 

북한이 남침을 하여 양측 죽은 숫자는 200만명이나 넘는다. 이념의 영은 사람을 죽이는데 희열을 느꼈다. 

 

남한의 좌익들

 

남한의 좌익들은 북한정권의 지령에 따라 행정단위별로 행정기관인 인민위원회와 경찰에 해당하는 치안대를 만들고 청년동맹, 여성동맹, 직장동맹, 농촌위원회등과 같은 단체들을 조직했다. 

 

이들은 6.25전쟁기간 중에 북한 공산군의 점령지역에서 붉은 완장을 차고 다니면서 자행한 악행은 무고한 애국인사들의 학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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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공산군이 어느지역을 점령하면 그 지역의 좌익들은 치안대를 조직하고 치안대가 주동이 되어 그 지역 주민들 가운데 살해해야 할 살생부를 작성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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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장을 찬 좌익들은 경찰, 우익운동가, 종교인들 등 대한민국에 대한 충선도가 강한 인사들이 주된 살해대상이었다.  죽창을 들고 초법적 살인도 마다하지 않는 동력의 근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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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익들은 살생부가 작성되면  사람들을 철저히 수색하여 학살했고, 그 살해 대상이 도피했으면  그 가족들을 잡아 고문을 했다. 군중들을 모아서 군중으로 하여금 살해대상을 몽둥이로 때리고 돌로 쳐서 죽이게 했다. 

 

좌익들은 북한 공산군이 후퇴할 때 그들과 함께 북으로 가거나 공산 빨치산이 되기위해 산악지대로 들어가면서 우익인사들에 대한 학살을 더욱 큰 규모로 자행했다.

 

14연대중 1개 대대가 제주 4.3사건으로 차출되면서 남로당 출신의 좌익들은 단지 동족을 향하여 총을 겨누지 않겠다는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들은 동족을 향해서 총부리를 겨누었다. 순천과 여수일대를 장악하면서 동족 수천명을 사살했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은 손양원목사의 가족살해에도 나타나듯이 단지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학살을 하고 좌익청년들은 인민재판을 통해 자신과 의견이 다른 자들을 학살했다는 것이다.

 

물론 깡패·양아치·부랑아들이 가세해 평상시 감정있던 사람들을 죽이거나 부자들 죽이기도 해서 민간인의 피해가 커진 측면도 있었다. 이들은 죽창을 들고 보도연맹에 가입하여 많은 우익인사들, 교회, 경찰, 학자등을 살해하는데 앞장섰다. 

 

9일 천하

 

그러나 10월 19일 밤에 시작된 여순 사건은 9일천하에 불과했다. 10월 23일 순천이 토벌군에 의해 탈환되고, 27일 여수가 탈환되면서 일단락되었다.

 

 빨치산들

 

빨치산은 1945년 해방 이후부터 1948년 여순 사건과 1950년 6·25 전쟁을 거쳐 1955년까지 활동했던 공산주의 비정규군을 말한다.

 

빨치산이 빨갱이로 통용되는 경우가 있으나, 빨치산은 러시아어 파르티잔(partizan), 곧 노동자나 농민들로 조직된 비정규군을 일컫는 말로 유격대와 가까운 의미이다.

 

이것이 이념 분쟁 과정을 통하여 좌익 계통을 통틀어 비하하고 적대감을 조성하는 용어로 표현된 것이 빨갱이다. 흔히 조선 인민 유격대라고 부르며, 남부군이나 공비, 공산 게릴라라는 표현도 사용되었다. 빨치산들은 움막을 만들고 거주하였다.

 

 

 

10월 19일 밤에 시작된 여순 사건은 10월 23일 순천이 토벌군에 의해 탈환되고, 27일 여수가 탈환되면서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김지회, 홍순석의 지휘로 지리산 등으로 입산한 반군들이 지리산을 중심으로 순창 회문산, 합천 황매산, 무주 덕유산 등에서 빨치산 활동을 하면서 유격 투쟁이 본격화 되었다.

 

일반적으로 빨치산을 구빨치산과 신빨치산으로 나누는데, 6·25 전쟁 이전에 입산한 빨치산을 구빨치산이라고 하며, 6·25 전쟁 이후에 입산한 빨치산을 신빨치산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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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 게릴라를 뜻하는 빨치산(partisan)은 일제 강점기 민족해방운동의 일한으로 전개되었으며, 해방 후에는 1946년 10월 항쟁뒤 야산대 형태로 활동하였다.

 

지리산 빨치산은 전남 구례, 전북 남원, 경남 하동, 산청, 함양 등에 걸쳐 있었으며, 인근 산악과 중소도시에 영향을 미쳤다. 정부는 여순사건이 발생한 1948면 10월부터 동계토벌시기(1949.109-1950.2)까지를 대상으로 강경진압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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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이승만정권과 미군은 광주주단 제5여단 사령부에 반란군토벌전투사령부를 설치했다. 당수 국방장관 이범석은 '반란군에 고함'이라는 포고문을 발표하면서 "천인공로할 죄과를 이미 범하였고, 아직도 범하는 중에 있다", "국가의 단죄를 필히 준열 엄격할 것이며 추호의 관용도 없을 것이다"고 하면서 급히 투항하라고 했다.

 

정부수립후 1948년 8월 24일에 체결된 <과도기에 있어서 군사와 안전에 관한 잠정협저>에 따라 주한민군은 작전지휘권을 소유하고, 여순사건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빨치산 소탕

 

1951년 겨울부터 이듬해 봄까지 백선엽 사령관의 지휘아래 전재괸 백야전사의 토벌작전으로 빨치산은 급격히 약화되었다. 100일간의 백야전사 작전이 종료되었을 때 사살, 생포된 숫자만 해도 9,000여명이 이르렀다고 주장했다.

 

전북의 빨치산은 6,500, 전남빨치산은 2000-2500명 전도였다. 백야전사작전이 끝났을 때 빨치산은 재기불능의 상태에 빠졌다.  53년까지 생존했던 빨치산은 1000명내외였고, 1952년까지만 해도 북한지령을 받았지만 동계토벌이후의 사정은 완전히 달랐다.

 

전쟁발발 당일인 1950년 6월 25일 내무부 치안국은 치안국장 명의로 전국도 경찰국에 '전국 요시찰인 단속 및 전국 형무소 경비의 건'이라는 비상통첩을 무선전보로 하달했다.

 

국민보도연맹원과 좌익인사에 대한 예비검속이 이루어졌고 대규모 집단학살이 자행되었다. 조선 인민군이 남하 하자 남한의 경찰은 형무소에 수감자를 끌어내 4000-7000여명을 학살했다.

 

전라도 지역에서도 보도영맨원에 대한 집단학살이 곳곳에서 자행되었다. 광주에서도 보도연맹원들을 사살했고 나주, 광산, 남양에서도 수백명의 보도연맹원들을 학살했다.

 

곡성지역의 보도영맨원은 150-200여명 이었는데 야산에서 처형했다. 구례지역의 보도연맹원들 30여명을 사살했다. 1950년 6월 27일에도 보도연맹학살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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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에서도700-800여명의 보동연맹원들을 사살했다. 여수, 함평, 해남, 완도, 영광, 무안, 영암, 장흥, 지도지역에서 보도연맹원들이 경찰에 예비검속되어 지서와 인근창고에 구금되기도 했고, 대량학살을 당하기도했다. 각 지역마다 수백명씩의 보도연맹원들이 있었다. 이들에 의하며 많은 교회들이 피해를 당하였다.

 

조선인민군이 점령하면서 학살과 처형의 주체가 바뀌었다. 각지역을 점령한 조선인민군은 지방 좌익과 함께 체제를 정비한 후 우익인사 색출해서 악질분자로 분류된 자들은 곧바로 처형되기도 하였고 광주형무소나 목포형무소로 이송되기도 하였다. 영광군 염산면에서 벌어진 민간인 집단학살건으로 지역민이 입은 피해는 더욱 컸다.

 

전쟁 발발 한 달 전인 5월 하순 인민군 1개 소대가 염산면 해안에 상륙했다가 소탕된 적이 있었는데 이것이 피해를 키운 원인 중의 하나였다.

 

영광군 염산면 내에서 황씨 일가 총 142명이 희생된 것을 비롯하여 축동리 장동부락과 동산부락 등의 우익진영 집안이 집단으로 학살을 당하기도 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뒤바뀌고 조선인민군이 퇴각하면서 집단학살사건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고흥에서  광주형무소로 이동되던 우익인사 50명이 희생되었다.

 

1950년10월부터는 상황이 바뀌면서 화순군에서는 지역민 80명이 좌익으로 몰리면서 좌익인사나 부역혐의자로 몰려 사살되거나 연행되었다. 지역민 대부분은 이념보다는 생존을 위하여 변화하는 상황에 따라 토벌대나 산사람을 선택하거나 지지해야 했다.

 

이로 인해 부역과 반동의 위험한 줄타기는 계속 되었고 군경토벌대와 빨치산 사이에 지역민은 심리적, 물리적 압박을 감내해야 했다. 토벌대가 머물다 떠나면 이내 빨치산들이 내려와 '반동분자', '반동부역자'를 가려내  처벌하고, 반대로 토벌대가 다시 들어오면 '빨갱이'에 부역했다는 이유로 처형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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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12월 6일부터 다음해 1월 14일까지 육근 제11사단 제20연대는 '공비'색출이라는 명목으로 전만 함평의 월야, 해보,나산에서 마을주민 524명을 집단학살했다. 이러한 학살이 자행되자 순수한 농민들까지 불갑산으로 들어가 빨치산이 되는 기현상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1951년 3월 29일 유치내산 일대를 포위 수색한 국군은 입산하여 피신하고 있었던 수백명의 지역민을 사살했다. 4월 9일에는 백아산 빨치산을 진압하러 국군들이 수백명의 민간인을 살상했다.

 

영광은 총인구가 14만명인데 군경이 진주하기 전에는 3만 8000명이, 군경이 진주한 후 6000명이 학살당했다. 장성에서는 총인구 11만 7000명가운데 2만 2213명이 사망했고, 담양, 함평에서는 9877명, 승주군에서는 7637명, 광양군에서는 6500명이 사망했다.

 

전남지역은 7월 하순에서9.28 후퇴까지 2개월간 인민군의 점령아래 놓여 있었다. 제5사단이 서울로 이동하여 수도방위에 나섰기 때문에 호남지구의 방비는 허술했다.

 

반면 신인민군 제6사단은 방호산 지휘하의 정예군이었고 빨치산 산이 신속히 퇴각하던 국군과 경찰을 상대로 교란작전을 펼쳤기 때문에 인민군의 전남지역은 비교적 수월했다. (임송자, 한국전쟁기 전남지역 빨치산 활동과 지역민, 동북아 역사논총)

 

구례의 빨치산 사건

 

10월 28-29일에는구례군 토지면 문수리에서 정부군과 반군사이에 전투가 벌여졌으며 제12연대와 경찰부대는 29일 오전에 구례군 토지면의 국민학교에 있는 인민군사령부를 기습하였다. 빨치산은 인민사령부를 철거하고 70-80여명의 소부대로 편재하여 난제는 산간지대에 잠복하다가 밤이 되면 산간마을로 내려와 보급투쟁을 전개하였다.

 

31일에는 빨치산 300 여명이 포위되었고, 11월 1-2일에는 구례지역에서 빨치산 23명이 사살되었고, 10여명의 민간인을 체포하였다. 11월 3일에는 빨치산의 김지회가 구례의 지서를 습격하고, 간전국민학교에 마련한 하사관교육대 숙소를 습격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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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초순에는 제3연대 2대대장 조재미 대위가 지휘하는 부대에 의해 주민을 부역혐의로 몰려 학살이 자행되었다. 서로 죽이고 죽는 상황이었다. 군이 주둔하면서 민간인 학살이 자행되었고, 민간인을 사살하고도 마치 빨치산이 사살한 것처럼 보고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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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사건이 발생한 이래 군경의 강경진압으로 동병사와 가족, 그리고 수많은 지역민이 희생을 당하였다. 빨치산이 구분되지 않았다. 여순사건은 군의 권한을 무제한으로 확대시키고 강화시키는 계기가 되어 5.18때 광주시민을 무자비하게 학살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군의 권한이 무제한인 것에 비례하여 일반 민중은 참혹한 고통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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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례지역은 정부군이 순천과 여수를 탈환한 이후 반군과 정부군이 집중적으로 교전을 벌인 것이었다. 반군의 공격이 대규모로 이어진 곳이기도 하다.

 

순천에서 퇴각한 반군과 광양 백운산 근방 산악지역으로 퇴각한 반군이 섬진강을 건너 지리산에 집결했기 때문에 구례는 10월 하순부터 11월 사이에 구례에서 크고 작은 교전이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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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빨치산들


결론을 맺자면 구례는 무력으로 교회를 죽이려는 빨치산들은 사라졌어도 사람을 살리는 교회는 100년이 지나도 계속 꿋꿋이 서 있다.  

 

  구례중앙교회

 

구례중앙교회는 자생적 교회였다. 1894년 고형표씨가 일찌기 미국으로 유람하면서 복음을 듣고 귀국하여 예배를 드리기 시작한데서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1895년에는 일본이 점령을 하다가 1904년에는 유진벨선교사가 와서 교회창립예배를 드렸다. 1908년에는 구례읍교회로 명칭을 정하고 시작하였다. 1920년에는 코잇 선교사에 의하여 교회가 다시 재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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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파된 교회는 구례읍교회의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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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의 피는 헛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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