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신앙유산답사기 (광주편)

예수의 영과 군부독재의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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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0-11-08 [2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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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에 위치한 광주는 빛의 고을이라는 뜻을 가졌다. 광주라는 명칭은 고려태조 23년(940)에 처음으로 쓰여졌고, 고려말의 3은의 한 사람인 목은 이색이 「석서정기」에서 "光之州"라고 하여 빛의 고을로 해석하고 있다.

 

광주 사람들은 빛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남장로교 선교사 유진벨이 오면서 광주는 진정한 복음의 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유진벨이 없이는 남도선교를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그는 선교의 열정메이커 였다. 그는 1898년에 목포스테이션을 만들어 영흥학교, 정명여학교, 목포진료소를 설립하였고, 인근지역에 선교를 하였고, 1904년 12월 20일에 광주에 와서 광주스테이션을 설립하여 교회와 광주진료소를 개소하고, 1906년 숭일중학교와 수피와 여고를 세웠다.

 

교회설립

 

유진벨은 목포처럼 선교스테이션을 만들면 항시 교회를 건립하였다. 북문안교회는 북문밖에 교회를 분리되면서 훗날 양림교회로 되었다. 배유지 목사는 선교 중심지에 항시 교회를 설립했다. 

 

광주의 4대문 안에 예배당 지을만한 곳을 물색하던 중 한국인 기독교인들이 예배당 신축 부지를 정부로부터 빌려 교인들이 건축헌금으로 거금 40달러를 모았고 선교사들도 교인으로서 80달러를 헌금하여, 1906년 6월 북문 안에 50평의 ㄱ자 예배당을 건축하였다. 이것이 광주에 지어진 최초의 예배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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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문안교회가 남문 밖으로 옮겨오자 북문밖의 교인들이 이제는 북문의 정 반대 쪽에 있는 남문 밖까지 밤 예배를 드리러 가는 것은 무리였다. 

 

그러므로 북문안 교회는 북문 밖 교인들을 위해 이미 1917년부터 북문 밖에 초가집을 사서 기도처를 운영하고 있었다. 이에 금정에 있는 북문안 교회는 제6회 전남노회의 허락을 받아 1920년 9월 4일 '북문밖교회'를 분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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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림교회

 

김창국 목사가 당회장으로 부임한 1922년의 금정  북문안 교회는 아직도 북문밖 교인들을 내보낸 '분립 분위기'가 가라앉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데 부임 2년만인 1924년 '양림구역'에 사는 교우들이 '양림교회' 분립을 요구하게 되었다. 북문안 교회는 북문밖교회를 분립하고 양림교회끼지 분립하였다. 북문밖 교회는 광주제일교회가 되었다.

 

밤에 교회가는 것이 너무 멀었고, 홍수가 와서 광주천이 범람하면 교회가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양림정(楊林町)에는 제중병원 직원, 숭일학교 학생과 직원, 수피아여학교 학생과 직원, 이일학교 학생과 직원 등이 있어서 금정교회 교인 500여 명 중 300명 정도가 양림정에 살고 있었기때문에 양림교회의 설립은 불가피 했다.

 

양림교회는 다시 셋으로 나뉘어져 통합,합동, 기장의 양림교회가 있다. 초기 한국교회는 배움의 기회가 없었던 사람들에게 성경과 한글, 그리고 산술 등을 가르쳐 문맹퇴치를 하기도 하였다. 여름성경학교시에는 성경공부뿐만아니라 문맹퇴치를 위하여 노력을 하였다.

 

특히 돈이 없어서 교육을 받지 못하였던 무산의 아이들의 문맹에서 벗어나게 하였다. 이들이 훗날 항일의식과 반독재의식을 갖게하였다.

 

  예장통합 양림교회

 

숭일학교

 

광주에는 유진벨에 의하여 1908년에 수피아여고와 숭일학교가 설립되어 광주의 항일의식을 움트게 한 근대 교육의 전당이 되었다.

 

두 학교는기독교신앙에 입각한 항일의식이 충실하여 교사와 학생들 수십명이 체포되어 구속되는 사태로까지 발전하였다. 숭일학교 학생들은 광주 YMCA조직과 전개에 주도적으로 활동하여 민족운동과 농촌계몽운동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숭일중학교

 

수피아 여고  

 

1908년 변요한(John F.Preston)의 사랑채에서 시작된 수피아 여고는 1919년 3월 10일 수피아홀에서 비밀리에 치마를 뜯어 태극기를 만들고 3월 10일 광주의 장날에 독립만세를 외치기도 하였다. 왜경들은 교사와  학생들을 23명 구속하였다.   

 

 수피아 여고

 

오웬선교 기념관

 

오웬선교사가 1909년에 금성폐렴으로 목숨을 잃게 되자 오웬 친척들의 성금으로 1911년에 오웬기념관이 마련되었다. 이 기념관은 선교 공간만이 아니라 광주 신문화의 요람으로 되기도 하였다. 음악회, 연극, 무용, 세미나 등의 새로운 형태의 근대문화가 펼쳐졌다.   

 

오웬기념각

 

유진벨의 4대째 선교

 

유진벨은 목포에서 했던 방식 그대로를 광주에 재현시켰다. 그는 광주, 전남 지역의 선교의 아버지였고, 유진벨을 말하지 않고서는 광주 선교와 전남 선교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그는 호남선교의 대부였다. 그런데다가 다른 선교사와는 달리 현재 4대째 한국선교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자손들은 한남대학교를 세우기도 하고,  북한에 결핵병원을 세우기도 하였다. 유진벨 딸의 가계로서 인돈, 인휴, 인세반이 그뒤를 잇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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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벨의 사위 인돈(William A. Linton 1891-1960)은 전주 기전여고, 전주 신흥고등학교의 교장을 역임했고, 한남대학의 전신인 대전대학을 설립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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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돈의 세째 아들인 인휴(Hugh M.Linton, 1926-1984) 는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한국으로 돌아와 검정고무신을 신고 전라남도 섬지방과 벽지를 돌아다니며 200 여곳이 넘는 교회를 개척하였다. 1960년대 순천에서 홍수가 발생하여 결핵이 유행하자 결핵병원을 세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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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휴의 둘째 아들 인세반(Stephen W.linton)은 1995년 유진벨재단을 설립하여 현재 재단이사장을 맡고있고, 북한에 결핵환자들을 돕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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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벨은 한국선교를 위해 세번까지 결혼을 했다. 첫째부인 로티 위더스푼은 결혼한 지 7년만에 사별을 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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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사역을 위해 마가렛 휘태커양과 결혼을 하였지만 미국에서 가져온 자동차를 인천에서 광주까지 직접 운전하고 가다가 열차와 부닥쳐 뒤에 타고 있던 아내가 숨지고 말았다.  1921년에 줄리아 다이사트양과 세번째 결혼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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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벨이 설립한 교회만도 20개가 넘었다.  유진벨은 떠났어도 그의 자손들을 통하여 죽어서도 말하고 있었다. 그는 호남신학대학교 동산위에 안장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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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의 약력과 이력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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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제중원


1905년 유진벨선교사의 사택이 마련되었고, 지금까지 사용했던 임시사택은 1905년 12월 놀란(Joseph, Whnne Nolan, s노라노)선교사에 의하여 9명으로 시작된 의료활동이 시작되었다. 

 

광주진료소는 조셉 놀란이 초대원장으로 취임하였고, 하루에 2,000여명 이상 진료하는 광주 제중병원으로 시작되었다. 나병원, 결핵병원으로서 자리매김을 하여 많은 환자들이 몰려왔다.

 

  광주제중원

 

훗날 광주기독병원으로 발전되었다. 초창기의 의료장비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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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료기와 혈압계

 

이는 광주 최초의 근대병원이었다. 이처럼 광주의 근대병원은 선교사들에 의하여 시작되었다. 선교사들의 의료의 빛이 빛고을로 만들어 가고 있었다.

 

당시 환자들은 무당이나 한의체계에 익숙했지만 한의의 침만 갖고서는 지혈이나 수술, 나환자를 치료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많은 부분에 있어서 수술이 필요했다. 서양의사들은 우리 몸을 치료하기 위하여 해부학적인 기술을 갖고 근원적인 질병을 치료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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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서양 의사와 환자의 동문서답 진료를 알 수 있다. 나이를 묻는 질문에 한 환자는 "임금의 즉위 2년 넉달에 태어났습니다"라고 말을 한다.

 

연세를 확실하게 말해 달라는 말에 환자는 "생일 떡을 30번이나 먹었습니다"라고 답한다. "어디에 사느냐"는 질문에 "저 큰 길을 따라가다가 절이 보이는데 왼쪽으로 돌아서면 거기에 제 집이 보입니다"고 했다.

 

"언제부터 아프기 시작했는지 말씀해 주십시오"라는 질문에 환자는 "김아무개의 아들놈이 내남편의 삼촌의 딸과 결혼을 했는데 말입니다. 그 녀석이 제 조카인 자기 처를 마구 때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말렸더니  그 녀석이 곰방대로나를 때려서 이렇게 상처를 입게된 것입니다"고 말을 한다. 서양의사의 말에 구체성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도 미국 선교사들은 짜증내지않고 성실하게 진료해 주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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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중원은 나환자들도 치료하여 주어 그들이 목수라는 직업을 갖고 일을 할 수 있었다. 

 

  나환자 목수들

 

광주기독병원의 초대원장은 한국이름으로 놀란(노라노)이었고, 2년 후 2대 원장으로서 윌슨(우월순)이 맡았다. 윌슨은 1908년 2월 의료선교사로 도착을 하여 사역을 시작했고, 그는 포사이드의 나병환자치료를 이유로 1912년 나환자병원을 개설하게 되었다.

 

또한 결핵병동까지 마련해 결핵환자들을 치료해주었다. 윌슨은 한국의 슈바이처였다. 1913년에는 나병집단 거주자기 신축되었고, 1919년에는 나병환자들을 위한 초등학교가 설립되었다.

 

광주 제중원은 1910-1923년까지 106,444명을 진료하였다. 수술환자는 3,159명이었다. 이처럼 예수의 영이 들어간 선교사들은 10만명 이상을 살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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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성경공부를 가르쳤고 직업 전문교육을 시켜 결혼하고 가정을 이루고 살 수 있도록 했다. 

 

윌슨이 여수로 내려거 애양원병원사역을 하자, 광주제중원은 브랜드(Louis C, Brand), 순천 스테이션의 개척자 프레스톤의 아들인 프레스톤( John F.Preston Jr)이 그 뒤를 이어 나갔다.  

 

윌슨선교사는 애양원의 초대 원장을 맡아 한국의 나병환자들의 아버지가 되었을 정로도 한국의 나병치료에 많은 공헌을 했다. 변요한 2세는 순천선교지를 개척한 프레스톤의 아들로서 부자가 의료선교로 한국에 공헌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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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핑


이 병원에서 영양실조로 숨질 때까지 간호사로서 일을 한 서서평은 독일 출신 미국인으로서 한국의 나이팅게일이었다.  

 

그녀는 1880년 태어나 1934년 세상을 떠난 독일계 미국인 간호선교사다. 본명은 엘리자베스 쉐핑(Elisabeth J. Shepping)이고  한국 이름은 서서평이다. 엘리자베스는 외할머니로부터, 쉐핑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았다.

 

독일 비스바덴에서 태어난 그는 외할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미국에 살고 있는 어머니를 찾아 미국으로 건너가 간호학을 전공했다. 가톨릭에서 개신교로 개종한 그는 1912년 32살이 되던 해 미국 남장로교 해외선교부의 간호선교사로 선발되어 한국과 인연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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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핑은 가톨릭 미션 스쿨에서 중고등학교를 마치고, 성마가병원 간호전문학교를 졸업한다. 뉴욕시립병원 실습하던 중 동료 간호사를 따라 장로교회 예배에 참석하고 개신교로 전향을 했다.

 

그러나 카톨릭교도인 그녀의 어머니는 개신교로 개정을 했다고 해서 그녀를 집밖으로 쫏아냈다. 그녀는  3세 때, 10대 때, 마지막으로 40대에 어머니에게 모두 세 차례 버림당한다. 어린 시절이 불우했지만 바람, 햇살, 숲과 함께 자랐다고 고백했다.

 

1904년 뉴욕 성서교사훈련학교(Bible Teacher Training School)의 여행자를 돕는 선교회(Traveler's Aid Missionary)에서 1년 동안 봉사하고 1911년 졸업 이후 동료 선교사에게서 조선에 환자가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하고 길에 버려질 정도라서 의료 봉사가 절실하다는 말을 듣고, 한국 선교를 지원한다. 1912년, 미국 남장로교 해외선교부 모집에 지원하여 간호선교사로 파송을 받는다.

 

그녀는 1912년에 한국에 도착해서 광주제중원에서 간호사로 일을 했다. 군산 예수병원, 서울 세브란스병원 간호학교를 거쳐 광주 제중병원(현재 기독병원) 간호부장으로 부임했다.

 

광주에 온 그는 우리말과 풍습을 익히면서 한국식 이름을 지었다. 원래 성격이 급했던 그는 매사를 서서히 해야겠다는 생각에 성을 서(徐)씨로 하고 다시 그 뜻을 강조하려고 이름의 첫 자를 ‘천천히 할 서(舒)’자를 넣었다.

 

그리고 다소 모난 성격을 고쳐보겠다는 바람을 담아 ‘평평할 평(平)’자를 붙여 서서평(徐舒平)이라고 했는데 이는 그의 본이름인 세핑의 발음을 살린 것이기도 했다.

 

이 이름은 최흥종 목사의 도움을 받은 것이다. 당시 광주병원의 원장은 윌슨박사였다. 그녀는 한인들처럼 옥양목저고리와 검정통치마를 입었으며 고무신을 신고 된장국을 좋아했다. 철두철미 한국의 풍속을 따라 한국인처럼 생활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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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부터 1934년까지 32세에서 54세로 소천하기까지 22년 동안 광주, 제주와 추자도 등에서 간호선교사로 활동하였다. 미혼모, 고아, 한센인, 노숙인 등 가난하고 병약한 많은 사람을 보살폈고 그녀는 ‘나환자의 어머니’라 불릴정도로 나환자들을 극진히 보살폈다.

 

특히 최흥종 목사가 설립한 나환자 수용소를 틈나는 대로 찾아가 환자들과 함께 지내면서 치료에 도움을 줬고 당시 선교활동의 중요한 과제인 금주와 금연운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뿐만아니라 만주로 팔려가는 열아홉 살의 여성을 돈을 주고 구해내기도 했고 홍등가에서 일하는 여성들의 빚을 갚아주고 새 삶을 찾게 했으며 이렇게 구해낸 여성들을 자신이 설립한 이일학교에서 공부시켜 자활의지를 심어주기도 했다. 그녀는 전천후 선교사였다. 

 

광주 제중병원에서 일하는 동안 특별히 나환자와 걸인들을 돌보았으며 거리에서 나병환자나 거지를 만나면 집까지 데려와 목욕을 시키고 밥을 먹이고 자기 옷을 입혀보냈다. 엄동설한에 나환자 두 사람이 거리에서 추위에 떨고 있는 것을 보고 집으로 달려가 하나밖에 없는 자신의 담요를 둘로 나눠줬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자신의 사비를 털어 언제나 굶주린 사람들에게 자신의 음식을 나눠줬고 교회와 학교 운영을 위해 자신의 월급 대부분을 지출했고 고아들을 보살폈다. 우리 말에 능숙했던 그는 간호분야에도 뛰어난 업적을 남겼는데, 우리나라 최초 간호교과서, 실용간호학, 간호위생법 등 저술하고 간호사업사 등을 우리말로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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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조선간호협회(현 대한간호협회 전신)의 결성을 주도했고 그 초대회장에 취임하여 만국간호협회(ICN)와 일본 적십자사 간호협회에 가입시켰다

 

그녀의 사례금도  대부분을 빈민과 병자, 여성을 위해 사용했다. 입양하여 키운 고아가 14명, 오갈 곳 없는 과부를 가족처럼 품어 집에서 같이 지낸 사람이 38명었이다. 한국의 성녀 테레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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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아이들은 많이 입양을 하였다. 그녀는 최초의 여전도회를 만들어 여성들이 봉사하도록 하기도 했다. 또한 여학생을 위한 이일학교도 세워 오늘날 한일장신의 전신이 되었다.   
 

  한일장신의 전신 이일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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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일장신대학교


이처럼 서서평은 유진벨처럼 학교를 세우 후학들을 위해 노력을 했고 근대 간호학을 세우는 큰 공헌을 하였다. 많은 한국의 간호사들을 양성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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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가면 입양한 아이들을 양성했고, 병원에 가면 한센병환자들을 극진히 돌보았고 학교에 가면 한국여학생들에게 간호학을 가르쳐 간호학의 기틀을 닦았다.   

이외에 광주 양림동에서는 여성의 자립을 위해 양잠업을 지도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뽕나무를 더 심고 시설을 세우기 위해 미국에 기금을 요청하기도 했을 정도이다. 

 

제주에서는 여성의 자립을 위해 고사리 채취를 돕기도 했고, 임종 때에는 자신의 시신을 세브란스병원에 의학용으로 기부하여 그는 살아서나 죽어서나 온전히 희생을 하였던 것이다. 

 

장례에 자신의 세운 이일학교의 학생이 운구 행렬을 이루고 눈물바다가 되었고, 외국인으로서는 광주 최초의 시민사회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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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는 유진벨, 서서평같은 귀한 선교사들이 있었기 때문에 복음의 빛이 점점 비추고 있었다. 서서평이 사역할 당시 광주는 제국주의의 영으로 인해 어두운 마을이었다. 서서평이 죽기 전 5년 전에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있었다.

 

반제국주의 운동

 

광주학생독립운동을 통해 광주는 제국주의에 대한 항의의 빛을 비추었다. 광주는 빛고을인만큼 어둠의 세력들에게 종속당하지 않도록 항전하여 반제국주의의 빛을 비추고자 했다. 그래서 광주는 진정한 자유가 판을 치는 빛의 고을로 만드는 것이었다. 

 

1929년 10월 30일 광주에서 나주로 향하던 통학 열차에서 광주중학교에 다니던 일본인 학생들이 박기옥 등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광주여고보·현 전남여고) 학생 3명의 댕기 머리를 잡아당기면서 희롱했다.

 

이들의 희롱은 나주역에 도착해서도 계속됐는데, 이를 목격한 박기옥의 사촌 동생 박준채가 막아서며 다툼이 시작됐다.  이 싸움은 패싸움으로 번졌다. 일본 학생 200여명과 한국 학생 200여명이 집단으로 패싸움을 벌이며 광주역 주변은 아수라장이 됐다. 광주고등보통학교(광주일고)와 광주중 일본인 학생들간의 싸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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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사실이 다른 지역에 알려지며 독립 만세운동은 전국에서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서울과 평양 등 한반도에 있는 전국 300여개 이상 학교가 시위나 동맹휴학 등으로 항거했다. 참가 학생 수는 5만4천여명으로 당시 전체 한국 학생의 절반이 참여했다.

 

학생독립운동을 하다 경찰에 붙잡힌 사람만 1천600명으로, 이 가운데 170여명은 실형을 선고받았다. 또 582명의 학생이 퇴학을 당했고, 2천330명이 무기정학, 298명이 강제 전학 조처됐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은 3대 독립운동으로 꼽힐 만큼 역사적으로 중요한 항일 운동이었다. 학생들이 근대학문을 하면서 자유와 평등, 민주화의식에 눈을 떠, 저항정신이 발생했던 것이다. 특히 선교사들이 세운 광주숭일중은 항일운동의 중심이기도했다.

 

반독재운동

 

 518 광주민주항쟁운동은 역으로 말하면 신군부입장에서는 동족 살상운동이었다. 직접 사망한 것이 193명, 흐유증 사망자가 376명, 행방불명자가 65명, 부상이 3,139명, 구속및 고문피해자가 1,589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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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통일신라도 당나라를 끌어들여 동족을 살상했고, 고려도 몽골을 끌어들여 삼별초항쟁시 고려군을 살상했고, 동학혁명때도 조정은 일본과 청을 끌어들여 동학농민을 살상했고, 신군부 역시 공수부대를 끌어들여 광주시민을 학살했다.

 

삼국시대의 동족살상 비극이 현대까지 이어진 것이다. 국가는 자신의 정적을 치기 위하여 외국군대도 과감하게 끌어들이는 죄악을 저질렀던 것이다. 신군부의 만행은 끝이 없었다.  

 

한국판 킬링필드

 

1908년 5월 18일부터 10일간 광주는 한국판 킬링필드였다. 110년전 광주에 들어온 미국 선교사들은 하다못해 사회적으로 버림받은 나병환자들도 한 명 한 명 목숨을 귀히 여겼는데 한민족을 살상한 것은 미국이 아닌 한국인들이었다.

 

한 명의 인권과 인격을 개보다 못하게 취급하였다. 민주적인 이념을 가진 것이 그렇게 살상을 당할정도로 죄악이었는지 묻고 싶은 것이다. 광주시민이 죄악을 저질렀다면 합법적으로 재판을 신청하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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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들은 목놓아 울어댔지만 아무도 부활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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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수부대원들은 대검을 꼿고 마구사람을 찌르고 구타했다. 살인의 악령이 군부독재를 휩쓸어 신군부를 통하여 동족살상에 희열을 느꼈다.

 

제국주의의 악령이 민족을 살상하고, 이념의 악령이 동족을 200만이상 살상하고, 독재 군부의 악령이 광주시민을  수백명 학살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악령이 제국주의, 좌우익 이념주의, 군부독재주의를 통하여 무고한 시민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하였다. 

 

개를 죽일 때 이렇게는 하지않았을 것이다. 그들이 시위한 것이 잘못되었다면 재판을 통하여 처벌해야지, 좌익도 아닌데 단지 민주화운동을 하였다고하여 킬링필드처럼 사람을 살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지금부터 40년전에 한국판 킬링필드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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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이 아이의 심정은 어땠을까? 아이는 울 기력도 없었다. 그는 상처를 여민채 이미 어른이 되었겠지만 상처는 여전히 아물지 않았을 것이다.  한 사람의 권력야욕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죽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신군부속에 들어간 악령은 바리새인들에게 들어간 악령과 유사한 속성을 가졌다. 죄없는 사람을 억지로 죄인으로 만들어 죽이는 것이다. 아이는 그것을 알고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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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을 지켜야할 군인들이 국민에게 총 들이댔고, 학생들의 목숨을 수호해야 할 해경들이 학생들 피신을 시키지 않고 배에 들어가지도 않고 배가 가라 앉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결국 해경들의 뜻대로 배는 가라앉아 학생들은 빛의 고을에는 갈수도 없었다.  국민의 생명을 보존해야 할 군인과 경찰들이 국민의 생명을 담보로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고 있었다. 

사람을 살리는 기독교는 당시 광주민주항쟁시 피해를 최소화 하기위하여 타협을 추구하기도 하고, 무장해제를 요구하기도 하고, 문용동전도사는 살수가 있었으면서도 폭발하여 대량살상을 막고자 스스로 죽는 길을 택하였다. 

 

예장통합 총회장을지낸 한완석목사는 수습위를 조직하여 활동하기도 했고, 예장통합교단은 2000만원이나 되는 구호금을 전달하기도 했고, 기독교사회단체도 수습을 위하여 노력했다.        

 

 문용동 전도사

 

문용동은 호남신학대학 4학년생으로 광주의 이슬로 사라진 사람이었다. 그는 얼마든지 피할 수가 있었지만 다수를 위하여 희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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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항쟁에 시민군이 창설되면서 많은 무기가 시민군의 손에 들어왔지만 가장 가공할 무기(?)인 TNT가 도청 지하에 보관돼 있던 TNT였다. 문전도사는 그 정도의 TNT라면 1977년 이리역 폭발사고처럼 광주를 날릴 수도 있었다고 판단했다.

 

문전도사는 TNT의 뇌관을 제거하기 위하여 손에 폭발물을 들고 TNT를 가리키며 “이런 게 도청 지하실에 쌓여 있소” 라고 했다.  그러자  계엄군 요원이 들어와서 제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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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관을 제거하고 계엄군은 같이 떠나자고 했다. 그러나 문전도사는 떠나지 않았다. 그러자 계엄군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니 전도사님. 나랑 이런 거 알려지면 여기 있으면 맞아 죽어요. 아니 폭탄 제거하자고 할 때는 언제고 또 왜 여기 남겠다는 겁니까.”
 
그는 가족들이 와서 가자고 해도 나가지 않았다.
 
“도청 앞 분수대에서 시체 서른 두 구를 보았습니다. 집에서 죽으나 여기서 죽으나 마찬가지입니다. 죽으면 태극기로 덮어 묻어 주세요.”

 

문용동의 친구였던 윤상현목사도 문전도사가 TNT가 있다며 신학도로서 신앙인으로서 끝까지 지키며 나갈 수 없다고 했다.  윤목사는 GOOG TV와 인텨뷰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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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군은 27일 새벽, 도청에 있던 시민군을 향해 투항하고 나오면 살려 주겠다고 했지만 거짓말이었다. 계엄군은 투항한 시민군에게 총을 쏘아 댔다. 이 과정에서 문 전도사도 숨을 거두었다. 이처럼 문전도사는 광주시민을 살리기 위하여 자신을 희생했던 것이다.  

광주기독병원
 
광주기독병원은 518민주화운동 기록관에서 사적 10호로 되어있다. 그만큼 선교사들이 세웠던 광주기독병원은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518민주항쟁으로 부상당한 많은 시민들을 살리는데 안간힘을 다했다.   
 
518민주화운동 기록관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쓰여있다.
 
이 병원은 5·18민주화운동 당시 부상당한 시민들을 헌신적으로 치료한, 민주의료 현장이다. 병원에 있던 의료진은 일시에 밀려든 부상자를 치료하기 위해 침식을 잊었으며, 수혈할 피가 부족하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수많은 시민들, 어린 초등학생들까지 자발적으로 헌혈에 동참해 민주시민의 뜨거운 열정을 보였고,  긴박한 상황에서 광주시민은 남녀 노소 없이 한 덩어리가 되어 서로 돕고 위로하였다. 이 병원은 항쟁 뒤에도 항쟁 부상자들을 가족처럼 치료하고 돌봄으로써 기독교 정신을 빛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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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에서 부상당한 사람들이 광주기독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환자는 군부의 총탄과 구타에 의해 유혈이 낭자한 상태였다. 
 

광주기독병원, 518에 부상당한 환자를 이동시키고 있다. 


광주기독병원의 의사들은 한 명의 환자라도 살리기위해 숨가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광주기독병원

 
광주기독병원과 대한적십자사 광주전남혈액원은 계엄군의 집단발표가 있었던 1980년 5월 21일 석가탄신일 휴일에도 병원 문을 열어 부상자를 돌봤던 이들을 기억하고자 헌혈 캠페인을 마련했다.
 

  출처:연합뉴스


10일 광주기독병원에서 5·18 당시 계엄군 총탄에 숨진 박금희(당시 17세) 양의 고교 후배들이 헌혈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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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부상당한 시민들을 헌신적으로 치료한 민주의료 현장이 생생하게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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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기독병원의 박물관에는 병원이 광주항쟁시에 사상자를 치료했다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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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장통합교단

 

예장통합교단에서는 구호금으로 부상당한 광주시민들을 위하여  2000만원을 전달하기도 했고, 1980년 6월 1일은 기도일로 정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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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장통합 65차 총회에서는 광주사태의 평화로운 해결을 위해 전국교회에 기도를 요청하기도 하고, 대표자들은 타교단장과 함께 대통령을 만나 호소하기로 하고, 통합교단에서 위로대표단을 파송하기로 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65회 총회록



베츠헌틀리(Charles Betts Huntley, 한국명 허철선)

 

헌틀리 목사는 광주기독병원의 원목이었다.호남신학대학에서는 상담심리학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518항쟁을 만났다. 5월 항쟁 당시 광주에 있던 외국 선교사들 대부분이 각자 나름의 기록을 남겼다. 

 

피터슨 목사는 그의 회고록에서 헬기 사격에 대해 기술했고, 언더우드 목사 부부도 일부 출간된 비망록을 남겼다. 허 목사는 항쟁 내내 거리에서, 그리고 광주기독병원에서 수많은 사진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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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사진을 사택 지하실의 암실에서 현상했다. 

 

 

  허철선 목사 사택

 

 사진을 인화한 암실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사망자와 부상자 사진의 대부분은 허목사가 찍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헬기 사격을 증언한 피터슨 목사는 AP통신 테리 앤더슨의 통역을 맡아 광주를 누비고 다녔고, 독일어에 능통한 허 목사는 영화 <택시 운전사>의 실존인물인 독일인 TV기자 위르겐 힌츠페터를 그의 집에 머물게 하기도 했고, 그가 찍은 사진을 위르겐 힌츠페터에게 주어 힌츠페터가 사진을 세상에 내놓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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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독일 제1공영방송 ARD-NDR 동아시아 특파원으로 도쿄에 주재하던 힌츠페터는 녹음을 담당하는 동료 기자와 함께 서울에서 택시를 타고 광주로 향했다. 광주로 가는 길목이 모두 차단된 상태에서 택시 기사는 기지를 발휘해 샛길을 찾아 이들을 목적지까지 데려다줬다. 21일 광주에서 빠져나온 힌츠페터는 필름을 과자 상자에 담아 도쿄로 돌아왔다. 이튿날 독일에서 영상이 방송되자 큰 파문이 일었다.

 

이렇게 해서 광주의 진실이 점점 외부에 알려졌던 것이다. 외신들의 역할이 상당히 컸다. 허목사는 2017년 유진벨과 오웬, 셰핑이 안장되어있는 호남신학대학교 동산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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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광주항쟁이 사람을 죽이는 군부독재의 영에 의해 저질러졌지만 예수의 영이 깃든 광주기독병원은 한 명의 영혼이라도 살려내기 위하여 노력했다.

 

문용동전도사도 광주시민의 목숨을 구하기 위하여 계엄군을 끌어들여서라도 TNT 의 뇌관을 제거했고, 허철선목사는 목숨을 걸고 군부독재의 눈을 피해가며 광주참상의 사진을 찍어서 외부에 알리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문용동전도사는 망월동에 묻혔지만 허철선목사는 문용동전도사가 다닌 호남신학대학에 안장되어 문용동전도사를 대신하는 듯 했다.

 

예수의 영을 부여받은 광주기독병원, 문용동전도사, 허철선목사는 모두 광주시민들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안간힘을 썼던 것이다. 예수의 영은 살리는 영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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