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신앙유산답사기 (나주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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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0-11-10 [05:31]

전라남도할 때 '라'는 나주에서 따온 말이다.  그만큼 나주는 전라남도에서 중요한 위치를 갖고 있다. 이러한 나주는 곧 역사의 땅이기도 하다.

 

나주라는 명칭은 이미 고려시대 때부터 나왔고, 고종 32년에는 나주군수를 두고 나주 관찰부를 설치하였다. 1912년에는 나주와 나신을 병합하여 나주면이 되었다. 1981년에는 나주읍, 연산포읍이 금성시로 승격하여 나주군에서 분리되었다. 1986년에 금성시를 나주시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그만큼  나주라는 명칭은 역사적으로 오래된 명칭이다.

 

1896년 전라남도가 설치되었을 때, 관찰부는 나주가 아닌 광주가 되었다. 그러나 나주는 의병활동과 외세의 침략에 대한 저항의 중심지였다. 나주지역민들을 자극한 것은 1897년 목포 개항이후 영산포를 중심으로 일본사람들이 동양척식회사를 통하여 헐값으로 땅을 싸게 사들인 것이었다. 이것이 궁삼면 토지회수투쟁이었다.

 

▲  궁삼면토지회수투쟁 기념비

 

나주는 선천적으로 항일의식이 있었고 저항정신이 남달랐다. 나주는 을사조약 이후에 각 지역에서 의병이 일어났을 때, 나주의 유생들과 평민들은 의병진에 적극 참여하기도 하였다. 보수적 민족운동을 하는 지역이었다. 

 

나주는 선사시대때부터 사람이 살기시작하고, 통일신라시대는 장보고의 해상세력과 연결이 되었고, 고려시대는 왕건과 연결되어 고려창건에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고려시대 나주는 나주목으로서 전남지역의 중심지로서 역할을 하였다.

 

조선시대는 나주는 사족세력의 활동이 비교적 활발했고, 다수의 서원, 향약과 동약의 실시 등 유림의 문화가 발달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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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때부터 유학이 발달한 연고로 임진왜란때는 나주향교에서 최초의 의병을 조직한 곳이기도 하다.  나주향교는 사적 제483호로 1896년 을미의병기 이학상을 중심으로 나주의병을 결성한 장소이기도 하다. 나주의병은 장성에서 의병을 일으킨 기우만의 격문이 전달되자 나주의 유림들과 향리들이 나주향교에 모여 이학상을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의병을 일으켰다.

 

그리고 장성의병이 나주의병과 연합하여  광주로 진출하여 북상을 준비하다 선유사가 내려와 왕명으로 해산을 종용하자 결국 해산하였다. 그만큼 나주는 유림들의 영향력이 컸던 장소이다.  이러한 강력한 유림의 영향은 유진벨이 선교스테이션을 설치하지 못하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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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에 들어서 나주는 동학농민군이 봉기하였을 때 나주는 호남보수세력의 근거지가 되어 호남농민군에게 끝내 성을 내주지않았고, 그 결과 초토영이 설치되기도 하였을 정도이다. 1894년 동학농민이 무장에서 봉기한 이후 전라도 전역은 동학농민이 지배했다. 전라도 각 군현에는 동학교도들의 집강소가 설치되어 사실상 농민자치를 실행하였고, 군현의 수령들도 대부분 집강소와 협력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러나 나주만 동학세력과 협력관계를 맺고 있지 않았다. 나주는 민종렬 목사를 중심으로 나주성을 지켜냈고, 조정에서는 나주에 초토영을 설치하였고, 초토영에서 일본군과 경군이 지배하면서 동학군을 진압하였다. 나주 초토영에서 동학군이 230여명이나 처형되었다. 훗날 나주 수성군은 조정으로부터 동학군을 물리쳤다는 이유로 큰 포상을 받게 된다.   

 

  동학을 물리쳤던 나주성


나주는 고흥처럼 유림과 향리들이 중심이 되어 동학농민을 막아낸 곳이기도 하다. 나주의 보수성은 단발령이 내려졌을 때 유생과 향리들이 대항하여 '을미의병'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1896년초 나주 유생들과 향리들은 장성의 유학자 송사 기우만을 중심으로 단발령에 항의하는 의병을 일으켰다.

 

그러자 개화파정부에서는 관군을 전주로 파병하하 나주유생들은 자진해서 해상하였고, 전주에서 온 진위대는 자주성을 접수하고, 김창곤과 해남군수 정석진을 체포하여 처단하기도 하였다. 

 

나주의 유림과 향리들은 정치적으로 큰 타격을 받았고, 나주의 정치적 위상도 약해졌다. 그해 6월 정부는 나주 관찰부를 폐지하고 이를 광주로 옮겼다. 그래서 전라남도 도청소재지는 나주가 아니라 광주가 되었던 것이다. 나주의 보수성이 도청소재지를 광주에 넘겨주고 말았던 것이다.

 

나주는 1920년대 들어서 나주의 진보적 지식층이 중심이 되어 청년운동, 노동운동, 신간해 운동을 전개하여 대중들의 봉겅적 의식을 타파하고,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계몽운동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이러한 배경이 훗날 1929년 11월 3일 학생독립운동에 실실적인 발상지가 되게 했다. 

 

3.1운동 이후 전국 각지에서 청년운동과 노동운동과같은 사회운동이 일어났을 때 나주에서도 청년들이 적극 참여하기도 하였다. 신간회 운동 때도 나주지역에 신간회 나주지부를 설치하였을 정도로 나주는 반외세에 적극적으로 항거한 지역이기도 했다. 이와 같이 나주지역의 항일운동은 학생들의 의식에도 영향을 미쳐, 1929년 한인학생들간의 나주역 충돌사건을 일으켰다.   

 

1913년 7월 1일 호남선이 개통되면서 설치된 나주역을 이용하여  1929년 10월 30일 광주로 통학하던 한국 학생과 일본인 학생들 사이에 충돌이 발생하였는데 나주지역의 독립운동으로 확산되었다. 

 

정부에서는 당시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2008년 7월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이 건립되었고 2011년 9월 보훈기관에 등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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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에서 나주역에 열차가 도착하자 열차에서 내린 일본 학생이 한국 여학생(박기옥)의 댕기를 당기며 희롱하자 이를 두고 여학생의 사촌동생인 박준채라는 학생이 일본인 학생을 나무라자, 일본인 학생이 조선인 학생이라고 멸시하는 발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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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박준채 학생이 격분하여 주먹으로 때리자 서로 큰 싸움이 벌어지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대규모 항일 시위가 일어나게 되었고 그해 11월 3일 독립운동으로 확산되었다.

 

 

  출처:EBS 소토리

 

 

이 사건을 계기로 광주는 물론 전국 194개 학교에서 5만4000여 명이 시위나 동맹휴교에 나서는 등 전국적인 독립운동이 전개됐고, 박기옥 선생은 이듬해 1월 시험거부 백지동맹 등 학내 항일시위에 참여했다가 퇴학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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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국가보헌처는 1929년 광주 학생독립운동의 시작을 알렸던 댕기머리 여학생 박기옥(1913∼1947) 을 제74주년 광복절을 맞아 독립유공자로 포상했다. 박기옥에 대한 포상은 포상기준 개선에 따라 학적부 등에서 퇴학을 받은 사실이 확인돼 이루어졌다.
 

▲ 댕기머리를 한 박기옥 여학생

 
 
 박기옥 이 희롱을 당한 데 격분해 일본인 학생들을 응징한 사촌동생 박준채는 1990 애족장을 받았다. 
  

  박기옥의 사촌 동생 박준채 학생

 

  

당시 많은 학생들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고초를 격었다. 나주학생독립운동은 3.1만세운동, 6.10만세운동과 함께 일제강점기 때 일어난 3대 독립운동의 하나로 평가받는다. 이외에도 나주는 학생들의 만세 시위사건, 농민들의 농민조합사건, 궁삼면 토지회수 투쟁, 등이 끈질기게 벌어져 나주는 반제국주의, 반기득권자, 반독재를 표방하는 민족운동의 산실이었다.

 

나주는 인근 광주의 위세에 눌려 대도시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상실했지만 소도시로서 1980년 5월 17일 민중항쟁이 일어났을 때, 나주시민들도 적극 호응하여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다.  
     

1930년대 나주는 보수적인 전통사상에서 벗어나 신문명을 수용하면서 민족운동, 사회운동, 독서회, 야학, 청년회 활동을 중심으로 전개 되었다. 이러한 상황이 가능했던 것은 기독교의 영향으로 신교육을 받은 계층이 늘어나면서 가능했던 것이다.  

 

나주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첫발을 내디딘 사람은 1897년 봄 유진벨(Eugen Bell)과 해리슨(W.B. Harrison) 선교사였다. 이 당시는 대외적으로는 청일전쟁(1884-1895)이 끝나고, 대내적으로는 동학형명이 끝났을 때였다. 전국에는 최근의 코로나처럼 콜레라가 발생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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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레라가 첫번째 한국에 들어왔을 때는 순조 때 1821년이었다.

 

"이름도 모를 괴질이 서쪽 변방에서 발생하여 도성에 번지고 여러 도에 만연하였다. 경각간에 10명 중 한두 사람도 살지 못하였다. 서울과 지방의 사망자까지 합하면 모두 수십만 여명이나 되었다."  

 

 

동학혁명이 끝났을 당시에 벨과 의료선교사 해리슨은 콜레라 예방과 퇴치에 많은 힘을 기울려 효과적인 전도의 실적을 얻게 되었다. 그래서 고종황제로부터 감사패를 받기도 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벨과 해리슨은 1897년 목포에서 영산강을 따라 내륙으로 들어와 나주 영산포에 닿은 뒤 나주성 안에 초가집을 사서 전도에 나선다.

 

선교스테이션을 만들기 위해 성문밖에 넓은 대지를 확보해서 선교를 하려고 했으나 보수적인 유생들의 반대로 인해 선교를 하지 못하고, 자신의 조선어 교사였던 이문오에게 나주지방 선교를 맡기고 목포로 돌아간다.

 

그 이후 1903년이 되어서야 김치묵이라는 사람에 의하여 광암교회가 세워진다.  김치묵은 유진 벨 및 그를 따라다니는 조사라든가, 나주에 남았던 어학교사였던 이문오나 김윤환 등에게 전도를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김치묵의 아들 김재섭은 훗날 숭실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광주 수피아 여고에서 교편을 잡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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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이교회에서 봉사한 은퇴권사인 김추련의 시어머니의 동생이 목포 정명학교출신인 문학가 박화성이다. 박화성은 신여성으로서 당시‘한귀(旱鬼)’'라는 소설을 쓰기도 하였다. 당시의 배경은 광암교회 였다. 박화성 소설가는 초기 한국 크리스천의 인간적 갈등과 외부적 박해를 잘 전개한 리얼리즘 소설을 썼다. 

 

광암교회 구성전

 

유진벨 선교사는 1908년 10월 10일 선교사 오웬 (C.Owen. 한국명 오기원)과 조사들과  함께 서문정에 예배당을 개척하고 서문정교회라 칭하였다. 

 

처음에는 유진벨선교사와 변창연조사가 시무하게 되었다. 1915년 3월 20일 목조로 예배당 18평을 신축하여 정식으로 교회를 창립하고 나주북문교회로 정하였다. 이후 나주교회로 명칭을 변경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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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교회는 1951년 분립되어 남문교회를 세우게 되는데 남문교회는 나주제일교회로 되었다.  

 

이이에도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 소속 유진벨, 하위렴, 마서규, 오웬 선교사는 나주군 지량(현. 나주시 용산동)에 초가집 한 채를 구입하여 1908년 12월 17일 조선 야소교 내산리교회(현, 영산포중앙교회)를 설립했다. 영산포 교회는 영산포 중앙교회와 분리 된다. 

 

  영산포 교회(합동교단 소속)

 

 

  영산포 중앙교회(통합교단 소속)

 

치유하는 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김의식목사가 영산포중앙교회 출신이다. 유진벨과 오웬 선교사의 전도의 씨앗이 한 청년에게 흘러들어가 출석 5,000여명의 교회를 담임하고 있다. 나주에 뿌려진 유진벨과 오웬의 복음이 화곡동에서도 열매를 맺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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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선교사들이 세운 교회는 지역의 교육과 신문화 활동에 영향력을 행사하여 훗날 나주 사람들이 근대화를 의식하고 신교육으로 인해 항일운동을 하는데 산파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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