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신앙유산답사기 (광양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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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0-11-19 [03:58]

1894년 동학 농민혁명 때 일본군 대본영이 조선에 파병한 ‘동학당 토벌대’로 농민 학살에 앞장섰던 하급 장교가 1895년 10월의 ‘명성황후 시해’ 때도 핵심 구실을 한 주범 가운데 한 사람으로 드러났다.

 

을미사변은 1895년 8월 20일(양력 10월 8일) 새벽 일본의 공권력 집단이 조선왕후(명성황후) 민비를 살해한 사건을 말한다. 자신의 시아버지 대원군과 정치적 갈등관계에 놓여있었던 민비는 청나라와 좋은 관계로 인해 대원군을 청나라에 4년동안 유폐시키기도 했고, 동학난 때에는 청나라를 끌어들여 동학난을 진압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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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비는 청을 끌어 들임으로서 자동적으로 일본이 한반도에 상륙하는 구실로 이후 한일합방을 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민비와 대원군은 대립관계에 있었고 무능한 고종은 자신의 결단력이 없는 사람이었다. 고종은 민비에 휘둘리고 대원군에 휘둘렸다.   

 

민비는 일본을 등에 업고 갑신정변을 일으킨 김옥균을 자객을 보내 중국에서 살해하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도 살해하려고 하였지만 이들은 모두 미국으로 도망을 갔다. 민비는 청과 러시아를 등에 업었고 개화파는 일본을 등에 업었다. 그의 친인척들은 과거도 보지 않고 입궐시켰다. 철의 여성이었다.

 

민비는 그가 의존했던 청나라가 1894년 일본과의 청일전쟁에서 패배한 후, 향후 그의 입지도 좁아졌고 결국 일본자객으로부터 살해를 당하고 만다. 이것이 을미사변이고 전국에서 의병이 일으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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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청일전쟁 승리 후, 조선에서 청나라의 영향력을 제거한 뒤 조선 내에 친일내각을 만들어 조선침략을 본격화하려는 야욕을 품자, 대외적으로는 영국, 독일, 프랑스가 일본의 세력확장을 경고하고 제동을 걸었다. 대내적으로는 민비가 강력하게 저항하였다.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화하려는 계획 아래 진행되던 조선의 친일내각 수립과 개혁이 명성황후의 주도아래 허물어지기 시작하자, 이를 막고자 1895년 10월, 건청궁의 옥호루에서 명성황후 시해를 실행하게 된다.

 

  민비가 시해된 장소(옥호루)

 

  명성황후

 

 

민비는 일본 낭인이 휘두르는 칼에 희생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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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러니칼하게도 1894년 동학 농민혁명 때 일본군 대본영이 조선에 파병한 ‘동학당 토벌대’로 농민 학살에 앞장섰던 하급 장교가 1895년 10월의 ‘명성황후 시해’ 때도 핵심 구실을 한 주범 가운데 한 사람으로 드러났다. 그 사람은 미야모토 소위였다.

 

그는 당시 일본군 후비보병 18대대 소속으로서 1894년 18대대 1중대와 함께 충청도 금산, 전라도 용담·진안·고산 등에서 동학 농민 토벌작전을 벌인 사실을 당시 일본군 대본영 참모본부 운수통신장관 겸 육군 소장이던 데라우치 마사타케(초대 조선총독)에게 보고한 적이 있다.

 

그 편지는 1894년 12월26일 쓰여진 것이었다. 그는 동학토벌에 나섰던 제18대대가 명성황후 시해사건에도 가담했다고 보고했다.(동학농민 학살한 일본군 장교 ‘명성황후 시해’에도 가담, 한겨레 신문, 2013. 8. 28. )

 

명성황후가 끌어들인 청나라가 동학난을 진압하러 오자. 일본도 청과의 조약에 따라 함께 동학난을 진압하고자 왔다. 결국 이들이 명성황후까지 살해하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그러나 민비를 살해한 일본 자객 중의 한 명도 결국 인천에서 살해를 당했다. 

 

한태원이라는 경기도 사람이 국모가 일인의 손에 죽었다는 사실에 울분에 차서 제물포를 통하여 귀국하려는 일본 낭인을 쫏아가서 살해를 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광양 웅동마을에까지 도망을 한다. 웅동마을은 백운산 깊숙한 곳으로 당시에도 약 20가정만 살고 있었고, 깊은 산중이라 찾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웅동마을

  웅동마을로 가는길


이미 마을사람들에게는 자신의 처지를 털어놓았고, 자신을 숨겨달라고 했다. 마을 사람들은 그를 보호해 주었는데 어느날 광주에서 한 관리가 외지인이 이 곳에 왔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왔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이 침묵을 하자, 관리는 같이 놀음을 했던 사람들에게 더이상 놀음을 하지 말고 광주에 가서 야소교 신자 조상학이라는 사람을 만나서 미래에 대한 희망의 메세지를 듣고 새사람이 되라고 조언을 하였다. 

 

당시 놀음을 하였던 세 사람이 3일 동안 걸어서 광주에 가서 조상학을 통하여 예수를 믿게 되고, 고향 웅동마을에 와서는 예배를 드리기로 했다. 놀음을 하다가 졸지에 예배를 드린 것이다. 그래서 웅동교회 모임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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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C채널

 

조상학목사는 훗날 공산당들에 의하여 순교된다. 선교사 오웬의 조사였던 그는 광양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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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원의 아들은 훗날 순천제일교회를 담임하시고 예장통합교단에서 총회장을 역임한 박정식 목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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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병준, 장기용의 자손들도 목사와 장로들이 많이 나왔다. 당시 한태원은 웅동마을에서 숨어서 살았고, 훗날 곡성으로 갔다는 소문이 있다.

 

 웅동마을의 폐가

 

당시 서병준, 장기용은 계속 웅동마을에서 신앙생활을 했고, 박희원은 이 곳에서 약 5키로미터 떨어진 신황리로 내려갔다.    

 

웅동교회(예장합동)


박희원은 신황리의 마을 사람들과 함께 교회를 세웠다. 전북동부지역의 최초의 교회가 되었던 것이다. 

 

  신황리 교회(예장통합)

 

신황리 교회는 한 때 500여명이 예배를 드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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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비가 살았을 때는 알렌이 민비의 조카 민영익의 상처난 팔을 치료한 것이 인연이 되어 조정에 제중원을 세워 복음이 전파되었고, 민비가 죽은 이후에는 한태원이라는 사람이 일본 자객을 죽인 것을 계기로, 광양에 복음이 전파되었다.

 

한태원이라는 사람이 광양의 깊은 산속 웅동마을에 숨어 들어와 지낸 것이 인연이 되어 교회를 세우게 된것은 하나님의 은혜 였다. 한태원을 잡으러 온 광주 관리가 같이 놀음을 하다가 야소교 조상학을 소개한 것이 해발 250 미터나 되는 백운산 웅동지역에 교회를 세우게 되었다. 민비의 죽음이 하나의 교회를 잉태하게 되었다.

 

명성왕후는 묘하게도 개신교와 인연이 있었고, 언더우드 선교사 부인과도 얘기를 나누기도 했고 한국도 미국처럼 부강한 나라가 되었으면 좋다고 한 적이 있다. 

 

명성황후가 시해되기 1년 전 크리스마스 때, 언더우드 선교사의 부인이 미국이 부강하고 자유로운 나라라는 이야기를 했더니 명성황후는 거침없이 “우리도 그런 나라를 만들 수 있지 않겠느냐”고 단호하게 말하기도 했다는 것. 언더우드 부인은 그 나라보다 더 좋은 하늘나라가 있다고 말하니, 명성황후는 그런 나라에 상감과 우리 백성들이 다 가서 살았으면 좋겠다고 했다는 것이다.([한국선교 130년 최초 선교사 알렌 이야기] (17) 명성황후 시해 참극에 맞선 알렌, 2015. 5. 30. 국민일보).

 

민비도 서구 개신교에 대해서는 호의적이었다. 민비는 정치야욕에 젖은 사람이었고 동학난의 진압에 해서는 청나라라는 외세를 끌어들여 동학농민들을 살해하도록 했고, 결국 일본이 한국에 합법적으로 한반도에 상륙하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외세의 의하여 수만명의 동학교도들이 죽어간 도화선을 제공해 주었다.  그러나 개신교가 정착하는데 민비의 공이 있었다.  

 

2015년 낭인의 외손자는 조부의 죄를 사죄하기 위하여 한국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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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도 세워진 교회가 항일정신을 갖고 제국주의의 항전을 하였다. 그 교회를 통하여 많은 목회자가 배출되고, 많은 신도들이 일제에 저항하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  민비로 인해 조정에 알렌이 제중원을 설립하였고, 민비의 죽음으로 인해 광양에 교회가 설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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