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신앙유산답사기 (강진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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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0-11-20 [06:03]

 

강진은 김영랑의 고향이기도 하다. 김영랑은 가장 땅 끝에 있는 강진에 태어나서 1934년 《문학(文學)》지에 ‘모란이 피기까지“를 발표하였고, 1935년 간행된 《영랑시집(永郞詩集)》에 수록되었다. 그의 시는 다음과 같다.


“모란이 피기까지는/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모란이 뚝뚝 떨어져버린 날/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모란이 피기까지는/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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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월(金素月)이 진달래꽃은 이별을 노래하고 있지만 김영랑의 모란은 기다림을 노래하고 있다. 모란’은 기다림의 꽃이다. 진달래는 이별을 상징하는 것이지만 모란은 기다림을 상징한다. 모란은 희망이 있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우리다.

영변(寧邊)에 약산(藥山)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모란이 피는 오월이 가면, 또 다시 모란이 피기를 기다리는 ‘봄’은 시인이 살던 시대상황으로 식민치하의 지식인들이 가졌던 실의와 좌절감에서 벗어나 그들의 보람과 이상이 꽃 피어나기를 기다리는 날이기도 하다. 여기서 봄은 희망이다.

 

어두움과 절망의 순간에서도 모란을 통하여 기다림을 버리지 않는 것이다.  영랑은 모란을 봄의 절정, 즉 봄의 모든 것으로 상징화하면서 삶의 보람, 삶의 목적을 거기에 귀일시키고 있다. 시인은 이 작품에서 ‘기다리는 정서’와 ‘잃어버린 설움’을 대응시키면서 당시의 시대상황을 반영하여 해방의 날을 기대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모란은 시인에게 희망과 기다림의 상징이었다.

 

김영랑 생가

 

땅 끝에서도 시인은 희망을 저버리지 않았다. 경기도 양평사람이지만 천주교 신앙으로 인해 유배를 당한 정약용 역시 새 날에 대한 희망을 저버리지 않기 위하여 약 500여권의 책을 쓰기도 하다. 특히 그가 쓴 경세유표는 동학난을 일으킨 전봉준에게까지 전달되었다고 한다. (홍동현, “1894년 강진지역 동학농민전쟁과 다산 정약용의 경세유표”, 다산과 현재 2015. 12),

 

강진은 땅 끝이지만 실학을 완성시킨 정약용이 500여권의 책을 저술한 곳이기도 하다. 가장 유명한 책이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심서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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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들은 조선왕조의 사회현실을 반성하고 이에 대한 개혁안을 정리한 것이다. 이들 저서는 유학의 경전인 육경사서에 대한 연구와 사회개혁안을 정리한 것으로 형이상학적이 아니라 실구시에 대한 것이다. 정약용 자신의 기록에 의하면 그의 저서는 연구서들을 비롯해 경집에 해당하는 것이 232권, 문집이 260여 권에 이른다고 한다. 그 대부분이 유배기에 쓰였다.

 

특히 《경세유표》는 국정에 관한 일체의 제도 법규의 개혁에 대해 논한 책으로, 정약용이 1808년(순조 8년) 유배지 강진군에서 짓기 시작하여 1817년(순조 17년) 집필을 끝냈다. 처음에는 48권으로 지었으나 필사과정에서는 44권 15책으로 편집되었다. 여기서 그는 토지와 세금문제를 거론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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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는 사회문제였다. 농민들의 항쟁은 대부분 토지와 토지세에 대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토지문제 및 농업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토지에 대해서 정약용은  정전제(井田制)를 토대로 하되 우선 부분적인 개혁인 정전의(井田議)를 제시하였다. 정전의는 수확량의 9분의 1만을 세금으로 납부하는 제도로 토지만이 아니라 모든 산업에 과세해야 한다는 세수의 방법론이다. 즉 세수의 방법이 근본적으로 개혁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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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역사 현상의 전반에 걸쳐 사상을 전개하였고 그의 사상은 조선왕조의 기존 질서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혁명론’이었다기보다는 파탄에 이른 당시의 사회를 개량하여 조선왕조의 질서를 새롭게 강화시키려는 개혁론이었다.

 

비록 유지배지였지만 강진에서 정약용은 국가에 대한 희망을 저버리지 않고 실제적인 개혁을 추구하였고, 국가의 개혁에 희망을 두고 책을 저술하는데 온 정성을 쏟았다. 특히 그는 서학과 실학을 통한 개혁을 추구하였다. 당대 최고의 지성인이었던 정약용은 한민족이 서구를 만날 때 희망이 있다고 판단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땅 끝 강진에서 위대한 실학사상이 정약용을 통하여 완성되었다.

 

정약용은 강진에서 위기에 처한 조선왕조의 현실을 개혁하고자 그 현실 개혁의 이론적 근거를 확보하기 위해 선진유학을 비롯한 여러 사상에 대한 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가 유배과정에서 불교와 접촉했고, 유배에서 풀려난 후에는 다시 서학에 접근했다는 기록도 이와 같은 부단한 탐구정신의 일단을 보여주는 사례로 보인다.

 

서구를 만났을 때 그의 개혁사상은 완성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정약용은 왕도정치에 따라 사회적 불평등성에 대한 문제의식까지 갖고 있었다. 정약용의 토지개혁론은 상업적 이윤과 ‘자본주의적’ 경영을 전제로 한 것으로, 농민에게 토지를 갖게 하되 양반 및 상공 계층은 제외하고 농업을 통한 상업적 이윤을 추구하게 한다는 점에서 서구 자본주의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자 정약용은 친구 이기경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서학의 기술과 과학에 관심을 많이 갖고 있다고 했다. 


“사실 난 서학의 기술 과학 분야에 더 관심을 가졌네. 천문(天文)•역상(曆象)․농정(農政)•수리(水利)에 관한 기구와 측량, 실험하는 방법 등에 대한 해박한 지식은 정말 놀라우리. 그들의 과학기술을 받아들여 연구한다면 조선은 더 위대한 과학을 창조할 수 있을 거야.”

 

정약용의 개혁 사상은 철학적 사유 내지는 역사관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그는 서학의 영향을 받아 새로운 천관(天觀)을 제시하며 천명(天命)과 인간본성이 이중구조적 단일체를 형성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그는 기존 성리학의 입장과는 다른 인간관과 윤리관을 가질 수 있었고, 제반 사회개혁론을 제시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게 되었다. 강진은 이처럼 위대한 대학자를 양성한 곳이었다.

 

그러므로 전봉준이 정약용의 경세유표사상을 읽고 동학농민혁명의 개혁을 추구하였을 가능성이 많았던 것이다. 그러나 강진의 유생들은 고흥이나 나주의 유생들처럼 동학에 대해서 부정적이었다.

 

“학이란 공 서양의 천주학을 동학이라 개명하여 백성들을 현혹하고 있는 것이다”고 하여 동학의 전파력에 상당히 우려를 갖고 있었다. 강재 박기현은 1893년경부터 장흥 강진 일대에까지 널리 퍼지고 있던 동학을 금하기 위한 조처로 김한섭, 김병휘(金炳輝)(1842∼1903)등과 함께 향약계(鄕約契)를 조직하였으며, 한편으로 갑오년 당시에 동학농민군들의 폐정개혁활동을 저지하기 위한 유생들의 대응활동에 참여하였다. 

 

  강진의 향약, 강회정

 

특히 그는 1891년부터 1903년까지 매일 기록한 일기를 통해 한말 장흥 강진 일대 향촌 사회의 동향을 소상하게 남겨 둠으로써 격동하는 당시의 역사적 면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박기현의 일기

 

이처럼 유림이 주를 이루는 강진에  1913년 11월 17일 강진읍 교회가 세워진다. 1914년 1월 탑동 207번지에 한옥 5칸을 구입하여 첫 예배당을 마련한다. 1917년 3월 초대 조명선 조사께서 사역하게 된다. 1919년 4월 4일 3.1 만세운동사건으로 이기성 외 13명이 구속된 역사의식이 높고, 믿음 안에 민족운동에도 힘을 썼던 교회이다. 또한 1940년에는 신사참배거부를 하며, 아편판매저지 계몽 운동을 펼치기도 하였다. 

 

이처럼 강진에서는 1893년 동학의 교세 확산을 단속하기 위해 향약을 시행했고, 전주성 철수 이후 강진에서는 동학교도들에게 별다른 활동이 보이지를 않았다. 강진지역의 동학농민군은 관이나 유생들을 압도할 정도의 세력을 형성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흥 동학농민군과 합세하여 1894년 12월 7일 강진읍을 점령하였으나 동학민들은 일본군이 온다는 소식에 바로 장흥으로 철수하였다. 

 

동학농민의 병영성 점령이후 나주에 있던 일본군과 관군은 일본 '미나미 고시로'의 지시에 따라 강진과 장흥으로 진출하였다. 결국 동학농민군은 장흥 석대들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무기의 열세로 패배하고 말았다. 당시 전투에 참여하였던 김재계는 당시 상항을 회상하였다.  

 

“십리 밖에까지 총알이 비오듯 전후좌우로 참벌 우는 소리가 나며 사람은 앞뒤에서 턱턱 거꾸러진다. 어찌할 줄을 모르고 갈팡질팡 산을 넘어 산으로 산으로 해서 어제밤 자정 후에 집에 돌아오셨다.”

 

서구의 기술과 과학문명에 일찍 눈을 뜨지 못한 동학농민들은 서구에 대해 일찍 눈을 뜬 일본군의 무기에 속수무책이었다. 근대화 무기의 열세에 빠진 동학농민들은 패퇴하게 되고, 색출작전으로 많은 농민들이 학살되었고, 병영일대는 시체들로 들끓었다. 강진은 모란꽃이 피기까지 봄은 찾아올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모란꽃은 피었고 봄은 찾아왔다. 강진이 서구를 만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강진 사람들은 1900년 초 서구의 종교를 포교하기 위해 찾아온 서구선교사들에게 한줄기 희망을 맛보게 되었다. 강진 사람들은 서양의 선교사들을 통하여 새로운 기독교를 수용하고, 재물로 얻고 잘 살 수 있는 새로운 희망을 얻게 되었다. 동학으로 초토화된 강진 땅에 복음이 찾아온 것이다. 

 

강진, 병영교회

 

당시 병영에는 최경화의 요청으로 프레스톤, 오웬 선교사가 들어와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설립하게 되었다. 강진의 병영교회는 선교사가 오기도 전에 주민들에 의하여  1902년 8월 19일 신경문씨 댁에서 첫 예배를 드림으로 시작이 되었다.

 

작천교회

 

  작천교회

 

선교사들은 작천면 마을마다 찾아가 하나님 말씀을 전했고 이때 작천면 현산리 토동마을에서 살던 김영승(작천교회 초대장로)씨가 신도가 되었다. 1905년 김장로는 토동마을 함정골 자신의 집에서 7명과 첫 예배를 드리며 선교를 시작했다. 이처럼 강진은 주민들이 이미 전도를 받아 스스로 교회를 설립하였다. 땅끝까지 이르러 증인의 역할을 한 것이다. 

 

지난 1905년 강진 작천면에 설립된 한국기독교 장로회 작천교회는 항일운동의 근원지가 되었고, 작천면에 기독교가 전파되는 밀알의 역할이 되었다. 이후 1935년에는 병영, 삭양, 작천 세 교회가 연합하여 담임목사를 모시면서 교회가 크게 부흥하였다.

 

강진읍 교회

 

강진읍교회는 기장소속 교회로서 6.25 전쟁 당시 순교자를 낸 교회이기도 하지만 한 송이의 모란꿏을 피우기 위하여 반독재투쟁에 앞장선 교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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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읍교회는 1913년 11월 17일 설립된다. 1914년 1월 탑동 207번지에 한옥 5칸을 구입하여 첫 예배당을 마련한다. 1917년 3월 초대 조명선 조사께서 사역하게 된다.

 

배영석 목사

 

1950. 8. 6. 에는 배영석 목사가 공산당에 의해서 순교를 당한다. 배목사는 곡성출신으로, 일제강점기에도 적극적인  항일운동을 한 사람이다. 그는 김재옥, 김원과 함께 3.1운동을 잇고자 3.1상회를 만들어 민족의 독립을 위하여 사업을 했다. 배영석목사는 조선신학교를 졸업하고 해방후 강진교회를 담임하다가 6.25 동란 때 인민군이 내려와 1950년 8월 6일 인민재판에 의하여 총살을 당했다. 

 

 빨치산

 

좌익이라는 이념을 통한 사단의 영이 그의 생명을 앗아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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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에 오신 선교사들은 살리는 영을 가져왔지만 좌익의 이념에 사로잡힌 자들은 죽이는 영을 가져왔다. 사단의 영은 제국주의, 이념주의, 독재주의를 통하여 사람들을 죽이는 쪽으로 갔다. 그러나 성령은 교회, 학교, 병원을 통하여 사람들을 살리는 쪽으로 역사했다. 오늘날도 교회의 본질, 기독교의 본질을 파괴하는 것은 좌익이라는 이념의 영, 어설픈 진보의 영, 바리새적인 교리의 영이 있다.이념의 영과 교리의 영, 제국주의의 영, 독재주의의 영은 교회를 파괴하고 분리하는 쪽으로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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