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신앙유산답사기 (영남편)2

조선건국은 정도전의 철학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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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1-02-10 [04:51]

조선이 건국과 함께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삼았다. 그러므로 성리학에 대해서 알아야만 조선의 정신사를 장악한 철학적 토대를 알 수 있다. 특히 영남은 성리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많이 있었고, 이 성리학을 토대로 조선은 이끌려 갔던 것이다.

 

특히 성리학을 조선건국의 이론적 토대로 삼은 것은 정도전이었고, 다양한 학자들이 있었지만 이를 이론적으로 발전시킨 사람은 김종직, 김일손, 김굉필,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 남명 조식 등이었다.

 

경북에서는 이황의 영향을 받았고 경남에서는 남명 조식의 영향을 받았다. 그들의 후학들은 성리학을 발전시켜 나갔다.

 

  퇴계 이황



남명 조식

 

그러므로 한국의 기독교를 알기위해서는 영남의 정신사를 구성하고 있는 성리학에 대해서 알 필요가 있고 이러한 성리학적 사고관에 따라 영남의 목회자들이 형성되었다. 퇴계의 14대 후손인 이원영목사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안동은 이원영목사로부터 절대적인 영향을 받았고, 후배목사들은 이원영목사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특히 많은 유림들이 기독교를 접하게 되면서 유교적 기독교가 형성되었던 것이다. 

 

경남의 손양원, 주기철, 한상동목사의 순교와 경북의 김광현, 이원영 목사의 사역은 유교를 빼놓고는 말할 수 없다.

 

  이원영목사

 

이들의 삶을 이어받은 후세의 영남 기독교인들 중에 한국의 기독교계를 지배한 대형교회 목사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그야말로 한국기독교계에 절대적 영향을 끼친 기독교의 종교천재들은 대부분 영남지역 출신이라는 것을 알 수있다.

 

유교의 사상을 이어받은 사람들은 대부분 정신이 살아있었다. 1세대 목회자들은 가마니를 깔고 천막에서 개척교회를 시작한 것이 놀랄만한 일이 아니었다. 그들은 정신으로 교회를 설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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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지역출신자들로서 대형교회를 일으킨 사람들은 대부분, 하나님의 은혜도 있지만 유교철학과 삶이 토대를 이루고 있어 정신적으로 상당히 강한 편이다.

 

김진홍 목사같은 경우, 넝마주의 목회를 통해 대형교회를 이루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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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계천 활빈교회


김삼환목사같은 경우, 논과 밭밖에 없었던 후미진 하일동, 명일동, 고덕동에서 머슴목회를 통하여 대형교회를 이루었고, 조용기목사같은 경우, 서대문, 여의도에서 치유목회를 통하여 대형교회를 이루었다.

 

영남은 하나님의 은혜가 토대를 이루겠지만 이들은 힘겨운 보릿고개를 경험하면서 선교사들의 사역을 이어나갔다.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계는 영남출신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고, 여러가지 이유중의 하나는 유림의 정신도 한 몫을 더하고 있다.         

 

최근에 한국교계에 목회적으로 절대적 영향을 끼친 조용기, 김진홍, 김삼환, 이성헌, 오정현목사와 학문적 영향을 끼친 이상근, 이종성, 전성천, 이상현 박사 등은 유림의 영향을 받은 영남출신들이다.

 

 이상근박사

 

그 이외에 수도권에서 성공한 목회를 한 중대형의 목회자들이 영남출신자들이 많이 있다. 기독교100년사를 쓴 박완목사도 영남(성주)출신이다.

 

그 이후 영남의 계보를 잇는 수많은 인사들이 기독교의 지도자들로서 우뚝서게 되었다. 호남보다 유학의 영향력이 강했던 영남에서 많은 기독교적 인물이 배출된 것은 유학적인 삶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기독교 1세대들은 대부분 유교의 정신이 토대를 이루고 있어서 때로 그들의 정신이 죽음을 초월할 정도였다. 유학의 정신에 토대를 둔 사람들은 단발령이 내려졌을 때 상투대신 자신의 목을 자르라고 했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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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의 충효사상은 위정척사운동으로 이어져 유림의병의 정신을 통해서 드러났고, 기독교와 접목되었을 때도 사회의 충성, 가정을 중시하는 정신은 모두 유교의 산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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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종교가 서구의 종교와 접촉하였을 때 위대한 역사가 발생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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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작고하신 총회장을 지낸 김기수목사는 목회도 잘했지만 원로목사를 모시며 영원한 부목사를 자처한 것은 윗사람을 모신다는 유교적인 삶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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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교회분쟁이 가속화되는 상황에서 후임자가 전임자를 비판하거나 몰아내려고 하는 교회 등을 보았을 때 영남출신자들이 거의 없다는 것은 철두철미 유교의 의리정신과 장유유서의 정신이 몸에 배었기 때문이다. 영남사람들만이 갖는 의리의 정신이 있는 것이다. 그런고로 유학의 영향을 받은 영남출신자들은 대부분 전임자를 무시하거나 비판하는 일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남을 지배한 성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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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조선과 영남을 지배하고 있는 유학정신에 대해서 알 필요가 있다. 그것은 공자와 맹자의 유학이 아니라 주자의 성리학이다. 주자의 성리학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이다. 처음에는 중국사상이었지만 정도전 등 많은 유학자들을 통하여 한국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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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는 성리학을 한국적 성리학으로 만드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퇴계는 하늘의 법칙에 해당하는 형이상학적인 理를 강조했고 율곡은 경험에 해당하는 형이하학적인 氣를 강조했다.

 

대륙의 합리론과 영국의 경험론의 차이와 같았다. 서로 강조하는 부분이 달랐던 것이다. 호남의 기독교는 수탈과 착취, 항쟁을 통해 영향을 받았지만, 영남의 기독교는 유교의 영향을 상당히 많이 받았다.

 

그래서 약간의 형태가 다른 면이 있다. 종교천재들은 대부분이 영남출신자들이다. 동학이론은 영남에서 탄생되었고, 실천은 호남에서 이루어졌다. 동학의 이론도 유교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영남은 이론이 발달했다. 유교를 체계화한 것은 호남이 아니라 영남이었다.        

 

성리학은 형이상학적 체계   

 

고려시대와 조선조에는 공자와 맹자의 유교사상이 전래된 것이 아니라 이들의 사상을 철학적으로 체계화 한 주자의 성리학이 전래되었다.

 

성리학은 중국 송(宋)대에 전래되어 내려오는 공자와 맹자의 유교사상에 性, 理과 氣를 부여하여 철학적으로 쳬계화한 학문이다. 성와 리가 가미되어 성리학이라고 하는 것이다. 요약하면 성리학은  ‘성리(性理)·의리(義理)·이기(理氣)’ 등의 형이상학 체계이다. 유교철학인 것이다. 성리학은 보통 주자학(朱子學)·정주학(程朱學)·이학(理學)·도학(道學)·신유학(新儒學) 등의 명칭으로 통용되고 있다.

 

성리학은 공자와 맹자를 도통(道統)으로 삼고서 도교와 불교가 실질이 없는 공허한 교설을 주장한다고 생각하여 이단으로 배척하였다. 한편 같은 유학임에도 불구하고 주희(朱熹)의 성리학이 이(理)를 강조하였기 때문에 이학이라 부르고 육구연(陸九淵)·왕수인(王守仁)의 학문은 상대적으로 마음(心)을 강조하였기 때문에 심학(心學)이라 부른다. 그러나 성리학의 주류는 理를 강조한 주희의 성리학(주자학)이다. 

 

성리학의 채택 이유

 

당시에도 성리학을 채택한 이유는 불교와 도교가 타락을 하거나 실제적인 종교가 되지못하였다고 판단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유학자들은 불교의 출세간성·반사회성·비윤리성 등을 공허하다(虛學)고 비판하면서 자신들의 성리학을 참된 학문(實學)이라고 정당화하였다.

 

당시 유학자들이 보기에 도교의 은둔 경향과 불교의 세속을 떠난 출가는 가정과 사회의 윤리 기강을 무너뜨리는 요인이었다. 그래서 고려의 학자들이 불교를 비판하고 새로운 세계를 위하여 성리학을 채택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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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리학은 가족을 중심으로 하는 혈연 공동체와 국가를 중심으로 하는 사회 공동체의 윤리 규범을 제시함으로써 사회의 중심 사상으로 발전하였다. 특히 ≪대학≫에 나오는 팔조목(八條目)인 격물(格物)·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수신(修身)·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를 개인의 수양과 국가의 통치를 위한 행위 규범으로 삼았다.

 

성리학은 주로 사회적 인간 관계와 개인의 수양이라는 두 측면에서 그 사상을 심화시켰다. ≪주례 周禮≫를 중시함으로써 사회 윤리인 예(禮)를 강조함과 동시에 우주 본체, 인간 심성과 같은 형이상학적 탐구를 심화시킴으로써 도교나 불교를 형이상학적으로 비판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였다.

 

성리학의 집대성자 주희는 유교의 텍스트들 중에서 ≪대학≫·≪논어≫·≪맹자≫·≪중용≫의 사서(四書)를 경전화시킴으로써 그 지위를 격상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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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는 공자의 교설을 제자들이 모은 것이고, ≪맹자≫는 맹자의 교설을 제자들이 모은 것이다. ≪대학≫·≪중용≫은 원래 ≪예기≫의 한 편이었는데 ≪대학≫은 증자(曾子)와 그 문인들이 지었고 ≪중용≫은 자사(子思)가 지었다고 생각하여 각각 한 책으로 독립시켰다.

 

주희는 사서의 정립을 통하여 공자(孔子)·증자·자사(子思)·맹자(孟子)라는 유학 도통의 계보를 역사적으로 예시하고자 하였다. 주희는 기존의 공맹의 유학을 유교철학으로 승화시켰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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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주희의 유교철학이 조선의 중심을 형성하는 정신사로 굳어졌고, 퇴계 이황을 통해서는 주리론, 율곡이이를 통해서는 주기론으로 한국화 되었다. 유학의 한국화였다. 경북은 퇴계 이황의 영향을 받고, 경남은 남명 조식의 영향을 받아 절개를 중시하는 정신사상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러한 유학의 철학은 기독교가 전래되어도 그대로 이어졌다. 영남의 기독교는 유학의 토대위에서 형성되었기 때문에 유교적 기독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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